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를 종식시킨 10·26 거사의 주인공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을 비롯한 일부 고위 관료들은 박 전 대통령을 앞세운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을 알고도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박 전 대통령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했으니 유승민 바른 미래당 전 대표의‘ 청와대 얼라들’이란 발언에 공감이 간다. 하기야 ‘저지레’(잘못을 뜻하는 사투리)만 하는‘ 얼라들’(아기의 경상도 사투리)이 무엇을 제대로 할수 있겠는가. 역사는 가정(假定)이 없겠지만, 만약 김재규 전 부장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정치는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진술했다. 특히 박근혜를 등에 업고 벌인 최태민-최순실의 국정농단이 40여 년간 이어져 온 사실로 드러나자 김 전 부장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결정한 지난해 3월 10일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공원묘원 정상 부근(해발 380여m) 깊숙한 곳에 조성된 김재규 묘소에는 국화 꽃다발과 김재규를 재조명한 ‘의사 김재규’ 서적 등이 놓여 있었다. 1면 톱기사로 ‘대통령 박근혜 파면’ 소식을 대서특필한 석간신문들도 보였다. 박정희가 즐겨 마셨다는 시바스리갈도 눈에 띄었다.(아래 사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후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긴 김재규의 명예가 새롭게 회복될지 주목된다. 김재규의 의협심과 충성심은 널리 알려져 있다. 김 전 부장은 당시 박근혜 퍼스트레이디와 최태민 목사의 관계를 우려, 최태민 일가의 비리를 조사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박 전 대통령은 이를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규는 또 10·26 거사가 있기 8일 전인 1979년 10월 18일 “부마(부산·마산)사태는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책 불신,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입니다.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가능성이 큽니다”라고 박정희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려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을 시키겠느냐?”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장기집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데모였다. 김재규는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부마사태를 해결했어야 할 김재규 전 중정부장이 박 대통령과 밀착된 차지철의 권력 암투에 밀려 옷을 벗어야 하지 않을까 예감한 것은 당연했으리라.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가장 믿었던 부하, 김재규와 벌인 술자리가 ‘최후의 만찬장’이 될 줄이야…. 혹자는 당시 대규모 시위로 번진 부마사태를 사전에 막지 못한 김 전 중앙정보부장의 책임을 물어 부장직을 그만두라는 박정희의 일방적 통보가 있기 전에 김재규가 이날 밤 차지철과 박정희를 해치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에 부역하며 승승장구했던 그가 말년에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암투를 비롯한 권력투쟁 끝에 우발적으로 술자리에서 상관을 살해한 것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박정희가 육사 2기 동기생으로서 고향(경북 선산) 후배인 김재규를 친형제처럼 잘 해주었는데 그를 저격한 것은 배신행위라는 것이다. “나는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리 한 것이었다. 아무런 야심도 어떠한 욕심도 없었다”라고 진술한 김재규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다음은 육군본부 계엄 보통군법 회의 대통령 시해 사건 공판에서 한 김재규의 최후 진술 일부이다. “10·26혁명은 5·16 혁명이나 10월 유신에 비해서 그야말로 정정 당당합니다. 허약한 자유민주당 정권을 무력하다는 이유로 밀어치우는 거와 앞마당에서 자기 마음대로 한바탕 혁명을 더 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여기에 비하면은 서슬이 시퍼렇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유신체제를 정면에서 도전해 가지고 유신체제를 타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민주주의를 회복하는데 완전히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10월 26일 혁명이야말로 역사상에 가장 정정당당한 혁명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혁명하는데 무혈 혁명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무혈 혁명으로써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없을 적에는 부득이 최소한의 희생은 아니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번에 10월 26일에 혁명이야말로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했던 겁니다. 이것은 여러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자유민주주의 회복과 자신의 희생을 완전히 숙명 관계로 만들어 놨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면 대통령 각하께서 희생 아니 될 수가 없게 돼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역적으로 몰렸던 조선시대 사육신도 재평가받고 인정받는 데 250년이 걸렸다. 10·26과 김재규도 역사적으로 새롭게 평가 받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한편, 국방부는 지난 8월 7일 “과거 기무사 회의실 내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보안사령관의 사진은 걸렸으나 제16대 보안사령관을 지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사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배제됐다”며 “이로 인해 논란이 되자 올해 들어 역대사령관들의 사진 모두를 제거한 바 있다”고 밝혔다. 대신 이들 사령관의 사진들은 기무사(보안사의 후신·현재 안보지원사) 역사관으로 옮겨졌는데 이 과정에서 김재규 전 사령관의 사진 또한 포함된 것이 이날 새롭게 드러나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다음은 1979년 12월 육본 보통군법회의 대법정 재판 때 강신옥 변호사에게 건네준 김재규의 칠언절구 한시(漢詩) ‘장부한’(丈夫恨·남자의 슬픔)이다. 眼下峻嶺覆白雪 千古神聖誰敢侵 南北境界何處在 國土統一不成恨 백설이 덮인 준령에는 오랜 세월의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다. 모두 하얀 산이니 거기 남과 북의 경계가 있을 리 없다. 이것이 이 땅과 이 민족의 형국이 아닌가. 이런데도 역사의 과오와 어리석은 정치로 통일을 못 이루고 있으니 한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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