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예기치 못한 쓰나미가 닥친 것도 아니고, 태풍이 몰아쳤던 것도 아니고, 물속에서 암초가 불쑥 솟아난 것도, 빙산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칠흑 같은 한밤중의 나룻배는 더더욱 아니다. 밝고 훤한 한가로운 바다 한가운데서 수천 톤 유람선이 뒤집어져 수백의 죄 없는 생령, 그것도 아직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 같은 어린 생령들이 어둠과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이토록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다니, 이게 믿을 수 있는 일인가. 글을 쓰는 것조차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최후로 배를 떠나야 할 선장과 선원은 제 목숨 먼저 건지고자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어린 학생들을 뒤로 한 채 저들만 아는 통로로 먼저 배를 버리고 떠났다. 이게 배를 책임진 사람이 할 짓인가. 무능한 정부는 배에 사람이 몇이나 탔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갈팡질팡 배 안에 갇힌 사람을 구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 수많은 생명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냈다. 무엇을,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인가. 단순하지만 명료한 의문이 머릿속을 채운다. 우리는 왜 공무원을 두는가. 군대를 두는가. 선거를 통해 왜 정치인을 뽑는가. 그들을 위해 왜 세금을 내는가. 국민이 위험에 빠지면 국민을 구해 달라고 보호해 달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게 국가와 국민의 약속이 아닌가. 그런데 그 약속이 휴지조각이 되는 것을 지금 목도하고 있다. 그뿐인가. 슬픔에 잠긴 실종자 가족과 분노와 좌절감에 빠진 국민에게 망언과 폭언을 퍼붓는 자들도 있다. 여당의 어떤 국회의원 나으리는 북한의 선동에 놀아날 좌파를 색출해야 한다 하고, 또 다른 어떤 국회의원 나으리는 사진까지 조작해 가면서 슬픔에 울부짖는 실종자 가족을 선동꾼이라고 내뱉는다. 또 재벌이며 국회의원으로 서울 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어떤 나으리의 자제분께서는 그들을 미개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급기야 어떤 보수논객은 ‘시체장사’ 운운하며 국가전복을 꾀하는 제2의 5·18을 막아야 한다는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 망언과 폭언은 한두 사람의 실언이 아니다. 한국을 지배하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의 한 줄기가 튀어나온 것일 뿐이다. 더더욱 슬프고 무서운 것은 세월호의 참극은 또 어제오늘의 일만도 아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자리를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방송을 듣고 기다리다가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6·25전쟁 때 이승만은 대통령이 서울에 있으니 안심하라 하고서는 다음날 서울을 버리고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수많은 생명이 불귀의 객이 된 것은 물론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 선조는 비가 오는 캄캄한 밤 백성들 뒤로 한 채 몰래 도성을 버리고 임진강을 건너 냅다 압록강 앞 의주까지 달아났다. 여차하면 중국으로 튈 심산이었다. 왕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자신들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믿었던 백성들은 왜군의 칼끝에 순식간에 원귀가 되고 말았다. 나는 배를 버린 선장·선원과 위기 대처능력이 결여된 정부의 무능, 이어지는 망언·폭언에서 이 나라 지배자들의 행동방식과 생각을 확인한다. 아울러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기나긴 세월 모두들 눈에 잡힐 듯 생생한 자식의 모습을 가슴에 묻고 고통에 떨 것이다. 혹은 부모의, 혹은 남편의, 혹은 아내의, 혹은 형제의, 혹은 친구의 다정했던 모습이 떠오를 때면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면 마치 내가 자식을 잃은 것처럼, 부모 형제를 잃은 것처럼 슬프고 무섭다. 하지만 더더욱 슬프고 무서운 것은, 망언과 폭언을 거듭하는 자들이 다스리는 세상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과 변혁이 없으면 비극이 또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부디 천국으로 가시거나 극락왕생하시옵기를! 다시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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