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 시, 꽃샘추위 속에서도 강렬한 봄볕이 실내로 들어온다. 놀라운 것은, 지난 달 핀 꽃 한송이였다. 죽은 것처럼 말라버린 작은 나무지만 수년간 물을 주고 햇볕 따라 옮기며 돌봤더니 8년 만에 꽃이 피었다. 화사한 분홍빛과 붉은빛이 섞인 꽃을 보노라니 시름시름 앓던 생명이 살아나는 작은 기적처럼 보인다. 늦게나마 식물과 함께 사는 공생의 묘미에 재미 붙여가며 사랑을 표하는 기술을 배운 것만 같다.
매일 아침 화사한 꽃 한송이를 바라 보노라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란 영화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노인이 어린 아들에게 앙상한 나무에 매일 물을 주라며 선승의 지혜를 들려준다. 제자에게 언덕 위 마른 나무에 매일 물을 주면, 언젠가 살아날 것이라는 고승의 이야기는 생명을 살리는 돌봄의 기술을 가르쳐준다.
말라버린 나무, 8년 만에 꽃이 피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라 화사한 꽃더미 이미지가 문자로 날아온다. 제자가 보내준 따뜻한 마음이 꽃처럼 피어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갖 꽃들이 떨어지는 우울한 소식에 적막해진다. 생활고에 지친 도시 한 구석, 세모녀의 죽음에 이어 떨어지는 꽃봉오리들의 애절한 소식이 매일 동시에 연달아 다가온다.
짝짓기경쟁 프로그램 같은 리얼리티 방송에 출연한 한 여성 꽃이 떨어진다. 고달픈 삶의 현장을 지키며 노동인권을 위해 살아왔던 여성 꽃도 떨어진다. 그런데 신문기사에선 그 이유를 개인사와 우울증이라고 진단한다.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에게 개인사와 사회사는 분리된다는 뜻일까? 여성이건 남성이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개인사와 사회사는 뫼비우스띠처럼 하나로 돌아가는 차원이 아니던가?
온갖 매체가 자살률 증가를 크게 걱정하며 원인과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0년 펴낸 ‘여성 자살 현황 및 정책 방안’ 보고서는 오히려 가족문제가 자살과 연관된 것을 보여준다. 자영업주와 무급가족종사자 중에서 최근 1년간 자살을 생각해 본 비율은 여성이 24.6%로, 남성 7.8%에 비해 훨씬 높게 드러나고 있다. 비정규직이건 정규직이건 여성 노동자가 남성 노동자보다 삶에 더욱 회의적인 여러 지표들도 제시되고 있다. 이런 성별 격차에 대해 “여성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전문가의 해석도 나온다.
전통적 가족주의, 최후의 보루일까?
가족이 인생의 고단함과 기쁨을 기댈 마지막 보루인 양 인식하는 가족관은 공공 복지제도와 사회공동체로 연결되는 망을 차단시킨다. 한국 사회에서 존속 살인률이 유독 증가하는 것도 위험한 경보이다. 미성년 자녀를 데리고 세상을 떠나는 부모의 죽음이 이어지는데도 경제난과 더불어 가족붕괴를 자살증가 원인으로 진단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세계적인 아동구호단체인 세이브더칠드런이 마침내 언론에 나도는 ‘동반자살’이란 표현을 보다 못해 그런 표현의 자제를 요청했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 아니다. 부모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 해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다”는 세이브더칠드런의 지적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뒤틀린 가족문화의 반인권적 면모를 드러내준다. 오래 전 농경시대 혈연중심 대가족 전통을 가족관으로 내려받아 가족과 가정을 최후의 보루인양 칭송하지만, 그런 가족관은 복지사회로 가는 대안적인 돌봄의 공동체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회원국 중 1위로, 지난 20년간 3배 늘었다. 특히 노인과 여성자살률 증가가 다른 나라들보다 유독 심하다. 치열한 경쟁 시스템과 더욱 벌어지는 자본 양극화문제 속에서 전통적 가족관의 복원은 변화된 세상 속에서 불가능하다. 시들어가는 식물도 물과 빛이 있으면 살아나듯이, 사회적 공공복지와 대안 가족적 공동체를 꽃피우는 작은 기적들이 이 땅에서 피어나는 변화와 실천이 봄과 함께 찾아온 위기 호출이다./유지나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