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독일에 머물면서 이 글을 쓴다. 20년 전 독일 처음 왔을 때 6시가 지나니까 대도시인데도 모든 가게가 셔터를 내리기 때문에 술이나 음료를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어서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독일은 소비자에게는 참 불편한 나라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명색이 노동 연구자였던 내가 순간적으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참 부끄럽다. 소비자인 고객에게 편의와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점원들의 장시간 노동과 감정노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후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누가 진상질을? 오히려 없고 약한 사람들이 그런데 그 때 이후 한국사회는 더 서비스 사회가 되어 정말 소비자의 ‘천국’이 되었다. 어디에나 24시간 편의점이 있고, 어디가나 ‘고객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반면 점원이 ‘고객’에게 찍히거나 그와 말다툼을 벌여서 문제가 생기면 해고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의 점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고용주만이 아니며, 영세 자영업자들을 화병나게 만드는 것은 ‘갑’인 가맹본부나 납품업체의 횡포만이 아니라, 생떼, 무시, 천대, 반말, 폭언, 성희롱 등 비인격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개진상’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의 악마적인 방법으로 골탕을 먹이거나 굴욕적 행위를 강요하기도 하기 때문에 어떤 자영업자는 득도(得道)하지 않고서는 그 일 못한다는 푸념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에는 ‘알바생을 뿔나게 만든 진상손님 최악 10’도 돌아다닐 정도다. 지난번 개그 콘서트의 ‘정 여사’ 편이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진상 손님’의 횡포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보여준 단면이었다. 그런데 당시 ‘정 여사’ 편에서 “있는 사람들이 더 하네”라는 마지막 멘트에서 나온 것처럼 귀부인들만이 ‘진상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점원들과 사실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 여성들, 빈곤층이 더 심각한 진상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 자신도 가정에서 남편이나 시부모로부터, 일터에서 고용주나 상관으로부터, 거래처의 ‘갑’들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이 ‘손님’으로서는 ‘왕’처럼 권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모두 90년대 이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백화점과 거리의 화려한 가게, 방송을 통해 쉼 없이 전달되는 상품 광고는 마치 우리 모두가 소비사회의 향연에 초대받은 당당한 주인처럼 되었다. 쇼핑은 자신의 존재의 증명과정이 되었고, 백화점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고객’ 대접을 받는다. 특히 힘든 현대인들에게는 바우만(Bauman)이 말한 것처럼 거대한 잔치 상 앞에서 맛난 것을 즐기거나, 장차 즐길 것을 상상하는 것은 일상의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약국과도 같다. 일상이 고통스러울수록 고객으로서는 왕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불만이 있어도 감히 대들지 못해도, 상점에 가서는 성질 사나운 진상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불공평할수록, 일상에서의 욕망의 좌절과 소외가 클수록 자영업자나 점원들에게 더 고약한 ‘갑’질을 하려는 심보가 나오는 것이 아닐까? 소비자에게 불편한 독일, 오히려 ‘저녁이 있는 삶’ 특히 초·중·고, 대학 어떤 과정에서도 단 한 번도 노동자 권리에 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자신이 사실 노동자이면서도 언제나 그러한 존재 자체를 부인하거나 자각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자신이 고객으로서 ‘왕’이 되려면 서비스 노동자는 지옥을 맛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대형 유통회사가 서비스 시장을 마구잡이로 포식하고, 오직 경쟁력과 성과, 편리함과 신속함만을 강조하는 한국식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세 자영업자는 벼랑 끝에서 전쟁하듯이 하루하루를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고약한 고객에게 ‘진상’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피고용자의 영혼을 파괴시켜야 한다. 결국 우리 사회는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할퀴어서 상처를 입고서도 “억울하니 출세하자”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이 ‘진상 손님’ 현상은 바로 한국사회의 불공정한 서비스 시장, 사회적 차별과 노동 소외, 병든 시민사회, 취약한 노동자 의식을 달리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와서 봐도 독일 동네에서 프랜차이즈 24시간 편의점 같은 것은 거의 볼 수 없고, 저녁과 휴일에는 물건사기도 식사하기도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소비자가 ‘진상질’은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곳에서 동네 자영업자나 서비스 노동자, 알바생들은 덜 상처받으면서 살 수 있고,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길 것이다./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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