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백년의 동아시아는 근대화의 시대이며 근대화의 시대란 서구의 학문과 문화를 표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이해한 시대이다. 근세 동아시아 역사에서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학문이 서구의 학문과 유사하다고 하여 실학에 대한 연구가 근대백년 동안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다산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 사상가이며 다산의 사상을 선양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연구소가 다산연구소이다. 이 연구소의 대표적 칼럼이 실학산책이며 실학을 대표하는 표어는 실사구시이다. 필자가 지금까지 게재한 글을 기초로 삼으며 추사의 「실사구시설」을 통하여 실사구시의 참뜻은 바로 유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훈고학의 실사구시… 실천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것 실사구시는 반고(班固)가 저술한 『한서(漢書)·하간헌왕(河間獻王)』·유덕전(劉德傳)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제자백가 시대를 구가하던 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의 학문적 전성기는 진의 통일과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의하여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의 통일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학자는 물론 문헌마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며 옛날의 서적을 찾아 학문을 다시 회복하려는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유덕은 “학문을 닦고 옛것을 좋아하여 실제 일에서 옳은 것을 찾았다(修學好古, 實事求是)”고 한다. 그가 수집한 책은 선진 시대의 고문으로 기록된 책들이었다. 그가 옛날의 학문을 닦고 책을 좋아하여 실사에서 옳은 것을 찾고자 한 것은 분서갱유로 사라지기 이전의 학문을 찾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옛사람의 학문을 회복하기 위하여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찾고자 끊임없이 없어진 책들을 수집하였다. 주석가인 안사고(顔師古)는 “사실을 얻어 항상 참으로 옳은 것을 찾기를 힘썼다(務得事實 每求眞是)”라고 주를 달았다. 이는 바로 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훈고학이 경전의 의미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중시하지만 문자풀이만으로 유학이 될 수 없다. 유학은 실천의 학문이며 실천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자(程子)는 ‘넓게 배움’(博學), ‘자세히 물음’(審問), ‘신중하게 생각함’(愼思), ‘밝게 구별함’(明辨), ‘독실하게 행함’(篤行)이라는 다섯 가지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빼면 학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청대의 고증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훈고학이나 고증학을 실증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하면 훈고학과 고증학을 유학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고증과 훈고는 유학의 진리를 참되게 이해하는 방편이었다. 그들이 지향하는 학문 유학의 진리인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周)·공(孔)의 도였다. 추사 김정희의 「실사구시설」…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 것 금석문에 대한 고증을 중시하여 우리나라에 금석학의 문호를 연 추사 김정희는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을 저술하고 「실사구시설」도 지어 명실상부한 실사구시학의 대표자이다. 그렇다고 추사를 실증적 진리를 추구한 객관주의자로 생각하면 이는 추사가 유학자라는 사실을 간과한 오해이다. 그의 「실사구시설」을 보면 실사구시의 참된 의미를 알 수 있다.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한서·하간헌왕전』에서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찾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학문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만일 실제의 일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헛된 방도를 편하게 여기거나, 옳은 것을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先入見)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聖賢)의 도에 배치(背馳)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시(是)”는 사실인식과 가치인식에 거의 구별되지 않고 통용된다. 이러한 구별이 없기 때문에 유학의 이해에 혼동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인식과 가치인식은 매우 다르다. 사실인식의 진위(眞僞)는 사실과 합치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지만 가치인식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은 판단하는 사람의 주관적 가치에 합치되느냐 않느냐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일에서 옳은 것을 찾는다”는 말은 사실인식과 가치인식을 동시에 충족시키기를 요구한다. 유학이 쉬운 듯 어려운 것은 이것 때문이다. 사실에 대한 인식이 넓고 깊어지면 과학적 인식과 만날 수 있지만 과학적 인식만으로 성인이 될 수는 없다. 이 둘 사이에는 주관 즉 마음이라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관문이 놓여 있다. 『대학』 팔조목의 첫째 항목인 격물치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추사는 실사구시설의 진의를 이렇게 천명하고 있다. “성현의 도는 비유하자면 마치 갑제대택(甲第大宅)과 같으니, 주인은 항상 당실(堂室)에 거처하는데 그 당실은 문경(門逕)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훈고는 바로 문경이 된다. 그러나 일생 동안 문경 사이에서 분주하며 당(堂)에 올라 실(室)에 들어가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끝내 하인(下人)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데 반드시 훈고를 정밀히 탐구하는 것은 당실에 들어가는 데 그릇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훈고만 하면 일이 다 끝난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저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는 데 있으니, 공론을 숭상하지 말고 실(實)을 구해야 한다. 허(虛) 것은 의지할 곳이 없으니 그윽하고 어두운 데서 찾아 텅 비고 광활한 곳에 도달한다면 시비를 분변하지 못하여 본의(本意)를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실사에 대한 바른 인식에 바탕하여 참으로 올바른 행위가 무엇인지 인식하여 실천함을 통해서 비로소 진리의 당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추사의 주장이다. 이는 유학의 진리인 도(道)를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법으로 현대의 주객분리의 객관주의 학문과 구별된다. 그래서 추사는 「실사구시설」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학문하는 방법은 한(漢)·송(宋)의 한계를 나눌 필요가 없고, 정현(鄭玄)·왕숙(王肅)과 정자(程子)·주자(朱子)의 장단점을 비교할 필요가 없으며, 주희(朱熹)·육구연(陸九淵)과 설선(薛瑄)·왕수인(王守仁)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다. 다만 심기(心氣)를 평정(平靜)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한마디 말만을 오로지 주로 하여 해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완당전집』에 실린 「실사구시설」의 원분과 번역문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번역을 참조하면서 수정한 부분도 있다. /이광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