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 하루에도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 /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치마 밑에 불이 붙어…” 지금 나이 지긋한 분들이 군대에서 배웠음직한 노래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불러댔지만 그 뒤안에는 근대사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냥 전래는 1880년 개화스님 이동인이 일본에 다녀오면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18년 일본인들이 인천 제물포에 “조선인촌회사(朝鮮燐寸會社)”를 세운 이후였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에겐 기술도 가르쳐주지 않고 공장도 세우지 못하게 하여 성냥 생산을 독점했습니다. 전기가 일상화되기 이전 성냥은 생활필수품이었기에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이 회사의 직원이 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성냥은 주로 수작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가난한 집안의 생활비나 학비 따위를 벌려는 10대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어린 소녀들은 하루 13시간 꼬박 서서 성냥개비 1만 개를 붙이면 60전을 받는 등 노동환경이 엄청나게 열악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녀들은 치마폭에 성냥 한 갑이라도 훔쳐 나왔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지배인 배척을 선언하고 임금 인상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동맹파업은 여성노동자들의 최초 노동쟁의로 기록될지도 모릅니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란 노래를 예전 군대에서 재미로 불러대곤 했지만 어린 소녀들의 아픔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푸른솔겨레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