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력 장 앞에 섰다. 바람이 분다. 12월의 바람은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불어간다. 봄날의 꽃들과 여름 한낮의 열정과 가을날의 우수를 데리고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으로 불어간다. ‘희망은 유혹일 뿐 /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황지우의 시 ‘12월’ 中) 가로수 밑에 낙엽이 되어 뒹구는 우리의 생은 얼마나 스산한가? 모파상은 그의 소설 ‘여자의 일생’에서 ‘그 검은 달, 한 해의 맨 밑바닥에 뚫린 어두운 구멍과도 같은 12월은 천천히 흘러갔다’라고 쓰고 있지만 12월처럼 허겁지겁, 허둥지둥 흘러가버리는 달이 또 있으랴? 12월은 늘 그렇게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휴가의 마지막 날처럼, 혹은 지고 있는 팀의 9회 말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빚더미와 같은, 비듬과도 같은 마지막 몇 날과 마주하게 된다. 삼진을 당하고 타석을 물러나는 씁쓸한 기분이거나 덧없는 나이테 하나만 굳은살이 되어 우리 삶 어딘가에 더께처럼 내려앉는 막막한 기분이 되어 저물어가는 한 해의 끝자락을 쓸쓸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덜렁 달력 한 장 / 달랑 까치밥 하나 /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 썰렁 저녁 찬바람 / 뭉클 저미는 그리움’(손석철의 시 ‘12월 어느 오후 全文) ‘하나’라는 말은 얼마나 허전한가? 나눌 수도 없고 함께일 수도 없는 그 말은 상실과 고독의 언어이다.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달력, 한 개의 까치밥, 한 장의 낙엽 위로 12월의 저녁 찬바람이 불어오면 그리움은 어느새 땅거미처럼 우리를 에워싼다. 12월은 그렇게 오롯이 외로워져야 하는 시간이다. 어떤 시인은 저녁이면 신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기분이 된다고 했다. 혼자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헷세의 ‘쓸쓸한 저녁’이다. ‘빈 병과 잔속에 / 촛불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 차가운 방, 밖에는 풀 위에 비가 내린다 / 떨면서 슬픈 마음으로 다시 눕는다 / 아침이 오고 저녁이 오고 / 언제까지나 되풀이 되지만 / 그러나 너는 오지 않는다’ 쓸쓸한 저녁 풍경이다. ‘그대들 두 손을 펴라 / 싸움은 끝났으니, 이제 그대 핏발 선 눈, / 어둠에 누워 보이지 않으니 흐르는 강물 소리로 / 어둠의 노래로 그대의 귀를 적시라 // 마지막 촛불을 켜듯 잔별 서넛 밝히며 / 누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그림자를 거두며 가고 있다’(강은교의 시 ‘12월의 시’ 中) 세모(歲暮), 제석(除夕) 등 한 해의 끝을 이르는 말들은 저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저녁은 어떤 시간인가? 삽을 씻고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새들도 아침에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하루에 저녁이 있고 한 해에도 저녁이 있듯이 언젠가는 우리 인생의 저녁도 올 것이다. 그 저녁들은 언제나 촛불을 들고 찾아온다. 저녁은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돌아와 촛불을 켜고 생각에 잠겨야 하는 시간이다. 싸움의 시간이 아니라 화해의 시간이다. 욕망의 시간이 아니라 기도의 시간이다. 증오의 핏발 선 눈을 거두고 흐르는 강물 소리로, 어둠의 노래로 우리의 영혼을 채워야 하는 시간이다.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 이불을 덮는 심사로 /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박재삼의 시 ‘12월’ 中) 나쁜 세상이었다. 증오와 탐욕과 소통부재의 세상이었다.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정치하는 자들은 민생은 뒷전이고 핏발 선 눈으로 싸움에만 골몰했고, 그놈의 이념이 뭐라고 잘 났다는 자들은 상대방의 말에는 꽁꽁 귀를 닫고 개똥같은 진보와 개똥같은 보수로 나뉘어 허구한 날을 멱살잡이로 지새웠고, 그놈의 돈이 뭐라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온갖 패악을 마다하지 않았던 나쁜 세상이었다. 아무도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지 않고 아무도 우리의 울분을 달래주지 않는 나쁜 세상이었다. 백열등 희미한 대폿집이나 하루치의 절망을 어깨에 걸치고 돌아오는 어두운 골목길에서도 비열한 시간은 흘러가는 것, 이렇게 12월이 오고 이렇게 또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다. 그래도 박재삼은 우리를 회유한다. 설목처럼 견뎌보라고, 이불을 덮듯 우리 자리를 덥히며 살아보라고. ‘12월은 잿빛 하늘, 어두워지는 세계다 / 우리는 어두워지는 세계의 한 모퉁이에 / 우울하게 서 있다 / 이제 낙엽은 거리를 떠났고 / 나무들 사이로 / 서 있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다 / 눈이 올 것 같다, 편지처럼’(최연홍의 시 ‘12월의 시’ 中) 12월은 떠나보냄과 상실과 우수로 점철된 어두운 시간이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시라!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고 아무리 어두운 순간에도 희망은 있다. 12월의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라. 따뜻한 편지처럼 눈이라도 내려줄 것 같지 않은가?/최대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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