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흔히 있던 일은 아니지만, 자신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는 글을 죽기 전에 남기는 경우가 있으니, 요즘의 표현으로 보면, 생전에 자서전을 짓는 격입니다. 그런 경우 ‘자서(自序)’니, ‘자전(自傳)’이니, ‘자지(自誌)’니, ‘자명(自銘)’이라고 부르는데, 다산의 자찬묘지명은 바로 ‘자지’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는 사후에 후손이나 제자들, 아니면 생전에 알고 지내던 문인이나 학자들에게 청탁하여 생애를 기록하는 글을 짓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이 자신의 생애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다산은 하도 험악한 세상을 살았고, 늘 죽음의 위협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았던 분이어서 사후의 일도 안심하기가 어려워, 아예 생전에 자신의 일생을 자신이 기록해두어야겠다고 여겨서 그런 글을 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묘지명’이란 지석(誌石)에 새기거나 구워서 묘 안에 넣어 오래 전해지게 하려던 글인데, 형편에 따라 글만 지어놓고 묘 안에 넣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광중본(壙中本)과 집중본(集中本) 두 편의 묘지명을 지었습니다. 광중본은 묘 안에 넣으려던 글로 간략하게 일생을 서술하였고, 집중본은 문집에 실어 전해지도록 자신의 삶과 이력, 학문과 사상까지를 상세하게 기록한 그야말로 자서전이었습니다. (이 두 편의 글은 졸역 『다산산문선』에 번역됨)
그 글에서 다산은 자신의 사람됨이 어떠했었나를 참으로 간략하게 썼습니다. “어려서는 영특했고 커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幼而穎悟 長而好學]”, “그 사람됨은 착함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했는데 행동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其爲人也 樂善好古而果於行爲]”라는 표현이 광중본에 나옵니다. 길고 긴 글의 집중본에는 “어려서는 영특하여 글을 제법 잘 지었다. [幼而穎悟 頗知文字]”라는 표현 이외에는 다른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산은 자신의 성품으로 세 가지를 열거한 셈입니다. 첫째 어려서는 영특했다는 것, 둘째 커서는 학문을 좋아했다는 것, 셋째 착함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했다는 사실입니다. 타고난 천품으로 영리했다는 것 말고는, 호학·호고·낙선이라는 세 가지가 있었던 셈입니다. 다산이라는 위인이 되는 데는 그런 조건이 작동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영특한 재주를 타고나더라도, 학문을 좋아하지 않고, 옛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착함을 즐겨할 수 없다면 학자나 위인은 될 수 없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서술하고, 벼슬하고 연구하던 시절, 유배의 고통 속에서 저술에 매진하던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숨김없이 기록했지만, 역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려면 다산처럼 호학·호고·낙선의 세 조건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산의 집중본 묘지명을 읽어가노라면, 어떻게 그렇게 지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해서,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밝힐 수 있었을까요. 호학·호고·낙선이라는 성품에 근면과 열성까지 합하고, 좌절을 모르던 용기까지 보태져서 그런 위인이 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