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항파두리에는 13세기 말(1271~1273) 몽고군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삼별초군의 항몽유적지가 있습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주말 오후에 찾은 항몽유적지는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이 적막했는데 순의비(殉義碑)에 이르는 참도(參道)를 걸어 갈 때는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참도 오른쪽에 깊숙이 파놓은 내성지 발굴 현장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고요한 유적지의 적막감을 깨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거의 정복하다시피한 원나라는 고려 18년(1231)부터 30년 동안 7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여 고려조정은 강화도로 난을 피해 옮겨가야했습니다.
이때 배중손 장군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군은 끝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원종 11년(1270) 6월 군사를 규합하여 대몽항전에 나섰지요. 그러나 역부족으로 조정은 원나라에 굴복하고 고려왕조는 개경으로 환도하게 됩니다. 이후 삼별초 군은 남하하여 진도의 용장성을 근거로 항전하다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 장군이 전사하자 김통정 장군이 부대를 이끌고 제주에 들어오게 됩니다. 삼별초군은 이곳 항파두리에 토성을 쌓고 계속 항전하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끝내는 원종 14년(1273)에 12,000여 명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항파두성이 함락되어 삼별초 군사들은 모두 죽게 됩니다.
당시 세계 강대국이었던 몽고군을 대상으로 끝까지 맞서 항쟁을 벌인 고려인의 드높은 기상과 호국정신은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으며 사적 396호인 유적지 안에는 항몽유적지전시관이 있어 700여 년 전 이곳 성터에서 벌어졌던 처참한 상황을 그린 기록화 7점을 비롯하여 기와편, 도자기류, 주춧돌, 절구통 등 51점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김통정 장군이 삼별초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쌓은 6km에 달하는 토성이 있으며 삼별초군이 항파두리 내서의 문을 쇠로 만들어 달면서 이용했던 밑틀로 추정되는 사대성문인 돌쩌귀도 그날의 함성을 말해주듯 여러 점 남아 있습니다. 비록 삼별초군은 몽고군에게 졌지만 고려인들의 불굴의 저항정신은 오늘날에도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솔겨레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