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청문회가 끝났다. 그런데 청문회를 마쳤는데 답답했던 가슴이 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새 상처를 하나 더 얻은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오간 말들, 그리고 국정원 댓글 사건의 책임자들이 이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하게 뱉어놓은 말들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되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은 생각이나 욕망, 사랑과 원망을 담는 그릇이고, 사람들 간에 마음과 생각을 전달하고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다. 말은 천 냥 빚을 갚는 자원이 될 수도 있고, 수십 년 묵은 한을 눈 녹이듯이 녹이는 신비한 힘도 가졌지만, 상대방의 가슴을 도려내 흉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는 언어는 특정한 사회적 조건, 권력관계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구사되며, 지배자가 자신의 적이나 반대세력을 차별화시키고 낙인을 찍는 것은 ‘상징 폭력’이라고 말했다. 한편 일상에서 우리는 `말이 된다`,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강자의 말이 사회구성원을 납득시킬 수 있으면, 말은 사회의 얽히고설킨 매듭이나 응어리를 풀어주는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 되지만, 권력자가 `말이 안 되는` 말을 계속한다면 그것은 강압이 된다. 이 경우 권력자의 상황 규정, 낙인, 강변 등은 그것과 직접 관련된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거나, 사회적 소통의 길을 막아 버린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정작 창을 휘둘러야 할 야당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방패를 동원해야 할 여당과 국정원, 경찰 측 증인의 말 공세가 더 부각되었다. 특히 부당한 상부의 수사 축소지시를 고발했던 권은희 수사과장은 바로 여당 의원들의 거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새누리당의 김태흠 의원은 “마음속에 (지지후보가) 있을 거 아니에요? 지금도 이 나라 대통령이 문재인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라고 그녀의 공인으로서의 행동을 정치편향으로 폄하하였으며, 내면의 생각을 들추어내라고 강압했다.
김진태 의원은 "수사 담당 검사가 좌익 종북이라 믿을 수가 없다"고 검찰 수사 자체를 일거에 무시해 버렸다, 조명철 의원이 권은희 수사과장에 대해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 경찰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공격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의 거의 정점에 도달했다. ‘말이 안 되는’ 답변은 원세훈, 김용판 증인의 변명에도 반복되었다. 그들은 국정원 직원들의 박근혜 후보를 편드는 댓글 작성과 찬성 표시, 문재인 후보에 대한 거친 공격과 반대 표시가 대북 심리전의 일환이라고 우겼다. 급기야 원세훈은 정권비판자가 모두 ‘종북’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속담에, “길은 갈 탓이요, 말은 할 탓이라”고…
오웰(Orwell)이 말했듯이 ‘흑백’이라는 말은 반대편에게 이 말을 적용할 때는 명백한 사실도 흑을 백이라고 우기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되고, 자기 당원에게 요구될 때는 당의 요구대로 흑을 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 충성심을 요구한다. 그들은 경찰 상부의 부당한 지시에 복종하지 않은 조직의 배신자 권은희 과장에게 보복을 가하기 위해, 그녀의 사상과 양심을 드러내라고 압박하는 언어폭력을 가했고, 그녀의 행동을 출신 지역과 연관시키는 더티 플레이를 하였다. 검찰의 국정원 수사에 ‘좌파’ 검사가 포함되었다는 이유로 그 결과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국정원과 경찰 책임자들은 자신들의 범법행위를 덮기 위해 ‘종북 척결’이라는 해묵은 명분을 끌고 왔다. 급기야 그들이 선거 직전의 여론을 돌리기 위해 퍼트린 수만, 아니 수백만 개의 인터넷 공작을 대북심리전의 일환이라고 둘러댔다.
한국사회에서 ‘좌익’ ‘호남’ 비하는 오직 강자들만이 사용하는 지배의 언어다. 반대편은 ‘우익’ ‘영남’ 비하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언어게임은 권력행사이고 곧 상징 폭력이 된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유리한 권력관계의 지형을 활용해서 언어폭력을 구사하였다. 이처럼 흑과 백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상대는 애초부터 대화의 상대가 아니고, 흑이 절대로 백이 될 수는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상대는 제압의 대상일 따름이다. 그 어떤 명백한 증거가 제출되어도, 아무리 설득력 있는 주장이 제기되어도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말이 안 되는’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강제력과 미디어를 장악한 권력자들이 언어폭력을 구사하는 세상에서, 침묵과 무조건 복종, 낙인과 색깔 덧씌우기를 강요당한 사람들의 좌절과 울분은 쌓여갈 수밖에 없다. 언어가 소통의 수단으로서 기능을 상실하면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 그러했듯이 이제 폭력이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될 것이다. 힘없는 국민들에게는 ‘말이 안 되는’ 세상이고, 권력자들에게는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된다는 이야기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