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diaspora)는 떠나고 흩어짐, 즉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다. 기원전 6세기 팔레스타인을 침공한 바빌론은 수많은 히브리인(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먼 이국땅으로 끌려온 이들은 그리움과 슬픔 속에 살아야 했다.
1842년 초연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Nabucco)’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애타게 기다리는 그들의 절절함을 잘 말해주고 있다. ‘요르단 강 언덕과 무너진 시온의 탑들에게 전해주오 / 빼앗긴 나의 아름다운 조국 / 오, 그립고 절망적인 추억이여.’ 고국을 떠나 만주나 연해주를 헤매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몇 차례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던 4인조 흑인 레게 그룹 보니 엠의 유명한 노래 ‘바빌론 강가에서’도 그 정경을 잘 말해준다. ‘바빌론 강가에 앉아 / 우리는 시온을 그리며 울었노라(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 Yea,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그 이른바 ‘바빌론 유수(幽囚)’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디아스포라’는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 떠돌아야 하는 삶이나 그 집단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디아스포라는 1860년대에 시작되었다. 관리들의 수탈과 흉년으로 기근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령(領) 연해주(沿海州, 블라디보스톡과 우스리스크 지역)로 떠났다. 자신들을 이역만리 낯선 땅으로 내몬 조국 조선이 미워서였을까,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으로 부르며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삶의 터전을 만들었지만 그 평화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30년대 독재자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던 것이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지붕에 올라 18만 명이나 되는 고려인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머나먼 카자흐나 우즈벡으로 떠나야 했다.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그곳에서 한국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경계인(境界人)으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구한말이던 1900년대 초 미국 공사 알렌의 주선으로 ‘살기 좋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이라는 환상을 좇아 7000여 명의 동포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뜨거운 사탕수수 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그들은 고국에서 보내온 처녀들의 사진만 보고 데려와 결혼을 하기도 해 ‘사진 신부’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1905년 ‘묵서갗(墨西哥, 멕시코의 한자 차음)은 문명부강국이요 수토(水土)도 좋고 기후도 따뜻하야 병질이 없는 나라이니 노동을 하면 큰 이익을 볼 수 있다’는 사기성 광고에 속아 1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수개월의 고달픈 항해 끝에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노예와 같은 중노동과 무서운 풍토 병 뿐이었다.
일제의 수탈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피해 보따리를 이고 지고 중국의 동북 3성으로 떠나야 했던 이들에게도,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나 ‘죠센징(朝鮮人)’이라는 이름으로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욕의 삶을 살아내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도,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겠다는 신념으로 바람 찬 북만주 벌판을 헤매던 이들에게도, ‘위안부’라는 아픈 이름으로 남지나의 전쟁터로 끌려 다녀야 했던 이 땅의 애달픈 처녀들에게도, 해방을 맞았건만 찢어지게 가난한 조국을 떠나 낯설고 물 설은 독일 땅으로 간 60년대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에게도 디아스포라의 삶은 외롭고도 고달픈 것이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오늘날의 이 땅에도 디아스포라의 이산(離散)은 존재한다. 배불리 먹고 싶어 북을 떠난 수많은 우리 동포들이 감시를 피해 중국과 동남아를 떠돌고 있고 ‘새터민’이라는 이름으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도 디아스포라의 삶이기는 마찬가지다.
엊그제 6월 30일은 이산가족찾기 텔레비전 생방송이 시작된 지 꼭 3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곽순옥의 구슬픈 노래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름과 나이와 고향을 적은 피켓을 들고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마저 모르는 이들은 ‘목 뒤에 흉터 있음’, ‘마을 앞에 시냇물이 흘렀음’ 같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정보에라도 매달려야 했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에 의해 기획되었다는 불순한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이 땅에서의 이산의 아픔과 슬픔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 해 여름, 이 땅의 어느 누군들 텔레비전 앞에 넋을 놓고 앉아 펑펑 소리 내어 울지 않았으랴?
천만에 가깝던 이산가족 1세대들이 12만으로 줄어들고 그분들마저 하루에 십여 명씩 만나지 못한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에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있다고 한다. 이들의 맞잡은 손을 떼어놓은 이들이 누구인가? 이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가? 이 땅에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그날은 언제일까?/최대봉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