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9년에서 1810년, 두 해 동안은 역사에 없는 가뭄이 들어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유민(流民)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참담한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그 해가 간지(干支)로는 기사(己巳)·경오(庚午)년이어서 흔히 ‘기경(己庚)의 가뭄’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산은 그때 강진읍내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만덕산 아래 백련사 곁의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백성의 문제와 나라의 일에 눈감지 못하던 다산, 역적 죄인으로 귀양사는 몸, 속수무책인 상태였지만,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우국충정을 참지 못해, 밤잠을 설치던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생각 끝에 젊은 시절 벼슬하던 때, 매우 가깝고 다정하게 지냈던 친구, 판서급의 높은 벼슬에 있던 김이재(金履載, 1767〜1847)를 생각해내고, 그에게 호남 일대의 가뭄 피해와 처참한 백성들의 실상을 민완(敏腕) 기자의 취재보고처럼 편지로 전했습니다. “5월 이후에는 구름 한 점 없고 40여 일 동안 밤마다 건조한 바람이 불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아 벼는 말할 것 없고, 기장·목화·깨·콩 따위와 채소·외·마늘·과일에서부터, 명아주·비름·쑥까지 타서 죽지 않은 것이 없어, 흙에서 나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것과 우리 백성의 일용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하나도 성정하는 것이 없는 가뭄입니다” “그런 지경인데도 고을을 책임진 벼슬아치들은 귀를 막고 어떤 소리도 들어주지 않고, 백성들을 만나주지도 않으며 더위만 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부역은 풍년 때보다 심합니다. 교활하고 사나운 아전이나 군교들은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의 것은 모두 토색해가고 있습니다” `여김공후이재(與金公厚履載)` “이 몸은 중풍 병이 점점 심해지고, 온갖 병이 도져 죽을 날이 머지않으나, 기쁜 마음으로 유배지 강 속에 뼈를 던지겠으나, 우국의 충정을 발산할 길이 없어 점점 응어리가 되어가므로 술에 취한 김에 이렇게 심중을 털어놓았습니다”라고 글을 마쳤습니다. 다산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런 가뭄, 이런 흉년에 죽어가는 백성들은 보살피지 않고 자기들의 몸만 살찌우고, 탐관오리 짓만 한다면, 반드시 ‘남우(南憂)’, 즉 남녘지방에는 민란이나 민중봉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무서운 경고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정인보(鄭寅普)는 “보라, 선생(다산)은 이미 동학란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지 않느냐”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심·간(心肝)이고, 백성들은 정부의 사체(四體)”라고 하면서 심간과 사체가 합해야 나라다운 국가가 되는 것인데, 백성의 뜻을 어기고, 백성은 안중에 두지 않는다면, 민중 폭동이나 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입니다. 중요 언론들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고관대작들은 야당이나 백성의 주장에는 낄낄대면서 눈도 깜짝하지 않습니다. 나오는 인사마다 국민들의 실망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다산의 애통터짐이 저의 가슴에도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언로를 열어야 합니다. 백성들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인사다운 인사를 해야 합니다. 촛불은 커지고 있는데, 묵묵부답이라니 말이나 됩니까.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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