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피해는 심각하다. 인명이나 물자의 손실이 엄청날 뿐 아니라 중요한 문화재나 기록이 약탈되거나 소실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불과 40년 만에 ‘왜란’ ‘호란’이라 불리는 큰 전쟁을 연달아 겪었고 그 와중에 수많은 기록들이 사라져 버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실록은 네 곳의 사고에 분산되어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 있던 실록은 재빨리 산속으로 대피하여 화를 면했지만, 나머지 세 곳에 있던 실록은 소실되고 말았다. 실록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서울의 승정원에 있던 `승정원일기`는 전량이 불타버렸고, 여러 관청에 분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의궤도 모두 사라졌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선 전기의 자료와 후기의 자료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바로 이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은 우리 출판문화도 바꿔 놓았다 왜란과 호란이 끝나자 전쟁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조선시대 최대의 출판소는 교서관이었다. 교서관은 주로 금속활자와 목판을 이용하여 서적을 출판했고, 특히 금속활자는 다양한 서적을 인쇄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가장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금속활자를 계속 주조하려면 동, 납, 주석, 철 같은 금속 재료가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했다.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교서관의 출판 기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교서관에 있던 금속활자와 목판은 전쟁 통에 유실되었고, 새로운 금속활자나 목판을 제작하자니 비용이나 재료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인쇄 수단으로 떠오른 것이 목활자였다. 목활자는 금속활자나 목판에 비해 인쇄 분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목활자는 제작비가 적게 들고 재료를 구하기 쉬우며 활자를 제작하는 시간이 짧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17세기 전반에 출판된 서적들은 대부분 목활자로 인쇄되었고, 출판을 담당한 기관도 훈련도감, 공신도감, 내의원 등으로 다양화되었다. 교서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관청에서 필요한 서적을 인쇄하여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교서관의 출판 기능이 정상화된 것은 17세기 후반에 가서였다. 선비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려는 노력은 민간에서도 나타났다. 큰 전쟁을 통해 집안에 있던 책들이 없어진 상황에서 비용을 최대한 절감한 서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궁유한사본(窮儒寒士本)’ 또는 ‘한사본(寒士本)’이라 불리는 이 책은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 목판으로 간행한 사서(四書)의 언해본이다. 궁유한사본이란 ‘가난한 선비의 책’이라는 뜻이다. 이 책이 간행된 장소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지방에서 개인이 간행하여 판매한 책으로 보인다. 궁유한사본은 우선 종이의 품질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떨어진다. 전쟁이 끝나고 물자가 부족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때문이다. 궁유한사본의 제일 큰 특징은 출판 비용을 절감하려는 노력이 곳곳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언해본이라면 한문 경서의 원문을 쓰고 행을 바꾸어 이를 번역한 언해문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책은 한문 원문을 대폭 생략하고 원문에 붙어있던 한자음이나 방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경서의 원문을 이처럼 심하게 줄인 것은 이전에 없던 방식이었다. 또한, 이 책은 한문 원문이 끝나고 행이 많이 남으면, 원문과 언해문의 행을 구분하지 않고 원문의 끝에 가로줄을 치고 바로 언해문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언해문을 주석처럼 두 줄로 새겨 글자를 더 많이 집어넣었다. 일반 서적에서는 원문과 주석을 구분하여 원문은 행마다 한 글자씩, 주석은 글자를 작게 하여 행마다 두 글자씩 넣었다. 그러나 이 책은 원문에 해당하는 언해문까지 크기를 줄여 두 글자씩 들어가게 했다. 이는 결국 소요되는 목판의 숫자를 최소화하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책의 분량은 이전보다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직후에 간행된 가난한 선비를 위한 책을 보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학문을 계속하려는 선조들의 처절한 노력이 나타난다./김문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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