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곡(가실) : 왜관(蘆谷 倭館) 또 여기서 일식정 북으로 칠곡군 노곡면(漆谷郡 蘆谷面) 즉 지금의 낙산리(洛山里) 속칭 `배터마을`에 왜관이 있었다고 칠곡군 향지 `칠곡지(漆谷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蘆谷坊 : 距府四十里 古之葦谷部曲也… ○ 有倭館舊址亦倭使水路朝京之站舍也` 노곡방 : (낙산리)⇒칠곡부에서 40리 떨어져 있으며 예날 위곡부곡(葦谷部曲)이다 ― 왜관(倭館)이 있었던 곳인데 왜국사신들이 조선 서울(한양)로 가는 수로(水路) 의 역참(驛站)이 였다. 또, 칠곡지 전부조(田賦條)에 의하면 대동왜료미(大同倭料米)가 년간 3백59석을 특별세로 징수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왜관에 내왕하고 있는 일본인에게 지급하는 식량이다. ▶관호리 왜관 (舊倭館) 여기서 또 북으로 일식정 거리에 있는 당시 인동군 약목면 관호2리(仁同郡 若木面 觀湖二里)의 백포산성(栢浦山城)동남쪽 아래의 왜관(倭館)이 있었다고 인동부읍지(仁同府邑誌)인 옥산지(玉山志) 강원조(江源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江源…中旨灘卽雙樹淵下流 栢浦灘卽中旨灘下流 倭館淵卽栢浦淵下流…` 즉, 백포탄은 곧 중지탄의 하류이고, 왜관연(倭館淵)은 곧 백포연의 하류이다. 하여 여기서는 `왜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강이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이곳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성주, 칠곡, 인동 등 낙동강 중류 연안에 1식정마다 설치된 3곳의 `왜관`은 조선조 언제 설치되었는지 그 치폐(置廢)에 대하여는 기록으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앞에서도 살펴 본바와 같이 태종 7년 7월 무인조(戊寅條)에서 조금 막연한 기록이나마 당시 경상도 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의 상계(上啓)에서 처럼, 울주 연해 개운포·서생포·장생포 등 3포에 거주하는 왜인들을 `육지원처(陸地遠處)로 이치(離置)`하였고, 또 태종 18년 3월 임자조(壬子條)에서는 부산포․ 재포·두곳의 왜인들을 역시 `육지원처(陸地遠處)로 분치(分置)`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왕조실록에서는 `이치(離置) 또는 분치(分置)`시켰다는 기록이 여러곳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동군(仁同郡), 칠곡군(漆谷郡), 성주군(星州郡)등의 낙동강 중류 연안에 1식정마다 설치된3곳의 `왜관(倭館)`도 앞에서 지적한 `육지 원처로 이치 또는 분치`하는 과정에 해당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 낙동강 연안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들은 모두가 향화왜인(向化倭人)들이다. 특히 조선초기의 향화왜인은 투항한 왜구가 많았다. 당시 경상도 한 도(道)를 보더라도 그 수효가 거의 2천에 이르는데, 앞에서도 살펴본봐와 같이 이는 조선의 왜구대책에 따라 왜구가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향화왜인은 대마도주의 사신, 표류인을 송환한 자, 왜승(倭僧), 삼포 항거왜인(三浦 恒居倭人)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또, 그 중 일부는 대마도로 돌아가서 후에 다시 통교자로서 도항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왜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향화왜인에 대한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치는 관직의 제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에서는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향화왜인을 각 지방에 분치하여 식량과 토지, 의복, 집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동안 전조(田租), 부역(賦役), 군역(軍役)을 면제해주었다. 이곳 낙동강 연안 3곳 왜관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관직을 제수받은 향화왜인에게는 관직에 상응하는 녹봉(祿俸)과 의복(衣服), 집, 노비 등을 지급하였다. 당시, 이곳 낙동강 연안의 `왜관`에 거주하는 향화왜인들은 그들이 살고있는 고을 원님의 통제하에 허가를 받고 출입을 해야한다. 그들의 생업은 주로 소금배를 몰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장사를 하는것이다. 또, 왜국사신들의 조경(朝京)길의 편의도 도우며, 사무역으로 입국한 왜인들의 도박(到泊)과 편의를 도우는 일도 맡아한다. 또, 한편 이곳 주민들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이곳 관호리 왜관은 향화왜인들의 도박장(倒泊場)으로서 그들은 소금을 배에 싣고와서 이곳 농민들의 쌀과 교환해 간다고 하는데 때로는 이렇게 그들의 교역장으로 몰려든 배가 수십척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 관할청인 인동부사(仁同府使)의 허가를 받고 동래온천(東萊溫泉)을 다녔다고도 한다. 이토록 설치된 `왜관`이 경상좌·우도에 걸쳐 낙동강 연안에는 일식정(一息程)마다 설치되었다고 지방읍지(地方邑誌)에서 밝히고 있으나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이곳 칠곡군(漆谷郡)의 군청소재지(郡廳所在地)로서 유일하게도 `왜관(倭館)`이란 지명(地名)으로만 현재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오늘의 왜관(倭館) 지금 지명(地名)으로 불려지고 있는 오늘의 `왜관`은 당초 설치됐던 곳이 아니다 . 당초 설치됬던 `왜관`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의 약목면 관호2리(若木面 觀湖2里) 백포산성(栢浦山城) 동남쪽 낙동강변(洛東江邊) 서안(西岸)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곳을 지역주민들은 `구왜관 (舊倭館)`이라고 부르고 있다. 백포산성은 낙동강으로 돌출한 나지막한 산인데 이산은 신라시대의 고성(古城)인 토성(土城) 즉 백포성(栢浦城)이 있다. 아마 백포성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다 《왜관》이 설치된 이유가 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오늘의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는 `왜관`은 관호리 `구왜관`에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약 3km지점인 낙동강 동안(東岸)에 위치한다. 여기는 한말 때 행정구역으로는 칠곡군 파며방 (漆谷郡 巴㫆坊)에 속했는데, 그야말로 허허벌판 황량한 모래밭에 불과했는데 강안(江岸)에 따라 송림(松林) 이 무성했다고 한다. 이 송림은 해마다 겪는 수해(水害)를 막기위해 성종 23년(1487) 석전리와 달오 주민들에 의해 조림(造林)한 것이라고 칠곡읍지(漆谷邑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박호만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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