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를 하고 쓰린 느낌을 없애볼 요량으로 아내의 화장대 한 쪽 귀퉁이에 겨우 비집고 서 있는 내 전용 크림을 바르다 문득 아내의 화장대를 본다. 참 복잡하기도 하다는 것이 솔직한 느낌이다. 생김새도 색상도 저마다의 모습인 크고 작은 용기들이 오밀조밀 앉고 서고 옆으로 누워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면도를 하고나서 스킨로션이나 바르고 그나마 호사를 부린다면 크림정도 더 바르면 끝인 나의 아침 일과에 비쳐볼 때, 저 많은 용기들을 순서대로 그것도 매일 아침마다 바르고 칠하고, 저녁엔 다시 닦아내는 아내를 보면서 참 여자들은 존경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더군다나 받던 전화기를 냉장고 안에 두고 이틀씩이나 찾는 기억력의 아내가 저 많은 용기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순서 하나 까먹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는 찬사를 아니 보낼 수가 없다.
디자인이 예쁜 화장품의 뚜껑을 열어본다. 내용물이 뭔지는 아예 모르겠는데 뚜껑마다 안쪽엔 거울이 달려 있다. 거울을 보니 어릴 때 생각이 난다. 4형제가 2살 터울로 컸던 터라 형제들 간의 다툼이 잦았었다. 그럴 때 할아버지께서는 형제들을 불러 모아서 차례로 거울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하고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에 서로 다투었는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거울을 보면서 해보라.”고 하셨다. 형제들 간에는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목소리를 높였던 일들이 거울 앞에만 앉으면 할 말이 없어져서 그냥 목을 빼고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할 애기가 없느냐? 그러면 나가서 의좋게 놀아라.” 하시면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곤 했다.
새 정부가 출범을 했다는데, 우리네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슨 소리인지도 모를 내용을 가지고 국회의원들 간의 싸움으로 식물 정부가 되었다는 뉴스가 낡은 레코드판 소리처럼 귀에 거슬리는 세태를 보면서 할아버지의 거울 훈육을 떠올리는 건 과문한 탓일까? 이백여 가지도 넘는 특권을 누린다는 국회의원들이 표 달라고 머리 숙일 때 외에는 국민을 편하게 해 준 일이 전혀 기억에 없는 이 나라에서 국민의 4대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발 좀 그 꼬락서니 안보고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국회의원들이라는 그네들 앞에 거울을 한 개씩 선물하고 싶다. 그렇게 핏대 올리며 떠드는 이야기를 거울을 보면서도 꼭 같이 하는지를 보고 싶어서다.
근세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 쌀 한 톨 나오지도 않는 명분을 가지고 정쟁으로 나라 망치고, 말기에는 나라를 열어야 한다 닫아야 한다는 구실로 정권 잡기에 이전투구하다 나라마저 빼앗겼던 선조들의 뼈아픈 교훈을 벌써 다 잊어버린 것일까. 뿐이랴, 1950년 김일성의 정신 나간 욕심에 나라가 절단 나고 외국의 원조액이 결정되지 아니하면 나라 예산조차 세우지 못했던 그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아픈 기억들을 죄다 잊어버린 것일까. 그 할애비의 광기를 이어받아 동족을 향해 불바다를 만들겠다느니 절단을 내겠다느니 연일 공갈 협박을 해 대는 북쪽의 깡패 집단들의 광기를 보면서도, 간이 큰 것인지 아예 무식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게 엉뚱한 소리 하면서 세월 잡아먹고 사는 국회를 점하고 폼 재고 있는 집단들에게, 일자무식의 농군으로 살다 가셨지만 손자들의 다툼을 거울 하나로 가르침을 주셨던 촌노(村老)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고 싶다.
가끔씩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꽃같이 이뻤던 색시 데려다가 할망구 만들었다는 지청구를 듣긴 하지만, “한 손엔 막대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백발이 저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는 고려 말 유학자 우탁 선생의 옛 시조처럼 가는 세월을 난들 어이하리요. 20~30대는 화장이고 40대는 변장이고 50대가 넘어서면 위장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긴 하지만 잠시 찬거리를 사러 동네 슈퍼 에 가면서도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가더라도 꼭 위장(?)은 하고 가는 아내를 보면서 감탄, 또 감탄을 하는 건 나뿐일까.
땡전 한 푼 없어 대출 받아서 식 올리고, 아내의 자치 방에 맨몸으로 기어들어가 신혼 생활을 시작한 형편이라 아내의 지청구에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하지만, 두 딸 낳아서 예쁘고 건강하게 키우고 맛 벌이 하면서 크지는 않지만 마음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잠들 수 있는 집 장만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내의 공인 것은 진즉에 인정한 터이기에 아내의 화장대가 새삼스럽다.
화장대 위 거울에서 흰색이 검은 색 머리칼 보다 훨씬 더 많은 중늙은이가 나를 본다. 그래 살아 온 날 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적게 남은 나이이기에 평생 호강한번 시켜주지 못한 못난 사내의 곁을 지켜 준 아내에게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옷매무새나 고치고 치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서 거울을 보는 세상이 되기를 기대해 보는 건 나만의 헛된 소망일까. 그래도 어렵게 마련한 내 보금자리가 김일성 세습집단의 미치광이 놀음에 또다시 참담하게 모두 무너져 내리는 일만은 제발 없기를, 권한만 부리지 말고 책임도 제대로 질 줄 아는 국회의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아내의 화장대 앞 거울을 보면서 빌어본다./정창호 칠곡군 세무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