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군은 예로부터 `호국의 고장`으로서 그 정체성이 널리 알려져 있는 고장이다. 더욱이 6·25전쟁 때는 55일간의 처절한 격전지(激戰地)이자 반격의 보루(堡壘)로서 세계전사(世界戰史)에 빛나는 낙동강, 다부동전투 (多富洞戰鬪)에서 산화(散花)한 호국용사의 넋이 기린 곳이기도 하다.
칠곡군은 전장(全長) 25km의 낙동강이 군역(郡域)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관류하고 팔공산(1,192m)과 가산(902m)을 잇는 유학산(839m) 지맥이, 대구 북편 관문에 협곡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요소마다, 전술상 적의 활동을 견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瞰制高地)가 산재 해 있어, 가히 대구지역의 북방의 진호지(鎭護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천연적 요충으로 국난때면 언제나 격전장이 되어 왔으며, 그 만큼 전화(戰禍)도 컸다. 한국전쟁때도 마지막 결전 태세로 임했던 낙동강 방어작전에서 칠곡군은 최후의 보루로서 난공 불락(難攻不落)을 과시하였다.
1950년 8∼9월에 걸친 적의 발악적인 집중 공세를 이곳에서 격퇴시키고, 이곳의 승리가 곧 반격의 전환점이 됨으로써, 이름하여 낙동강 대첩 (洛東江大捷)이야말로 `호국의 고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이다. 6·25와 낙동강∼왜관과 다부동에는, 당시의 격전과 시산혈하(屍山血河)의 참상을 말해주듯, 지금도 곳곳에 전흔(戰痕)이 남아 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둔 1개월 반에 걸친 공방전은 결국 북한 공산군의 참담한 패배로 끝났으며,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개시와 더불어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총 반격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낙동강방어선전투는 북한 공산군의 주력을 무찌르고 6·25전쟁 발발 이래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공세로 전환하는 발판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낙동강 혈전은 국민 총력전의 승리
6·25전쟁은 1950년 6월25일에 북의 김일성 집단이 남한마저 공산화할 목적으로 무력남침을 자행함으로써 일어난 전란이다. 이 전쟁은 유엔 16개국이 남한을 지원하고 중공과 소련(공군)이 북한을 도와 개입함에 따라 모두 20개국 전투부대가 참전한 국제적 규모의 전쟁으로 확전되어 반만년 민족사에 가장 많은 피해를 초래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침략자 김일성은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계획적으로 전쟁을 준비하여 남침 당시에는 지상군 10개 사단(전차 242대 포함), 공군 1개 사단(항공기 211대), 소규모 해군 등 총병력 19만 8380명의 공격형 대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반면에 남한 정부는 방위와 치안에 필요한 수준의 군대를 육성한 바, 같은 시기에 지상군 8개 사단(전차 미보유), 공군 1개 비행단(연락기 22대), 역시 소규모 해군 등 총 10만5752명의 병력을 보유하였을 뿐이었다.
북의 군사력은 수적으로도 2대 1로 우세했고 질적으로는 그 격차가 훨씬 더 컸다. 개전 초기 북한 공산군은 월등한 전력에다 기습의 효과까지 달성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까지 진출하였다. 침공 목적이 틀림없이 달성될 듯한 전황이었다. 국군은 열세한 전력에 초전에 입은 신대한 피해로 인하여 적을 격퇴하지 못하고 지연작전을 펴며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 정부는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동하였고 국민들도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피란길에 오르니 그 참상은 글이나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초전의 충격에서 벗어난 국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지원된 유엔군과 더불어 낙동강을 이용한 결사적인 방어전략으로 전환하였다. “적을 방어하라 아니면 죽어라(Stand or Die)”는 명령이 하달되었을 뿐만 아니라 “덩케르크(Dunkirk)나 바탄(Bataan)의 재판은 있을 수 없으며 더 물러난다면 역사상 최대의 살육이 있을 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남지∼왜관∼낙동리∼안동(남쪽)∼영덕을 잇는 길이 160km, 폭 80km였으며 왜관∼영덕에는 국군(5개 사단)이 왜관∼마산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군(3개 사단)이 진지를 편성하였다. 낙동강에 도달한 인민군은 지체없이 도강작전을 감행, 총력을 투입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의 공세를 취하였다. 이 때 낙동강 상류지역을 방어하던 국군은 적에게 밀려 다부동∼신령∼영천∼안강∼포항선까지 물러났다. 적은 대구 점령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이곳에 5개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 방어지역에 집중적 공격을 가하였다. 한때 대구에도 적의 포탄이 떨어지고 경주도 위협받았다. 이때 낙동강은 도하하다 흘린 인민군의 피로 물들고 연안의 산야는 쌍방의 시체로 뒤덮였다.
전선의 지탱 여부가 미지수였고 국가존망과 국민 생사가 기로에 처해 있었다. 훈련소에서 총 쏘는 방법이나 겨우 익힌 `소모품 소위`와 신병들이 계속 투입되었으며 일부는 카투사(KATUSA)란 이름으로 낙동강 서부의 미군 사단에 보충되었는가 하면 전투경찰도 속속 전선으로 전개하였다. 나이 많은 보충자원들은 노무자로서 전선 각 사단에 배속되어 탄약·식량·보급품 운반 등 전투지원을 담당하였다. 남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전선사단에 현지 입대하였고, 여학생들은 간호원이 되어 부상병을 보살폈다. 부녀자들은 부대의 취사를 담당하며 한 병사라도 더 전투임부에 종사할 수 있게 도왔을 뿐만 아니라 후방 국민들은 밤낮없이 군수품 생산에 바빴다. 낙동강 전선에 국민의 총력이 집중된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정으로 9월 중순에 이르러 적은 공격 역량을 상실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한 우군은 낙동강 방어가 지켜준 경상남북도의 동남단, 일명 부산 교두보를 발판으로 총반격에 나서 9월 말에는 침략자를 몰아내고 전쟁 전의 현상을 회복하였다(물론 전쟁은 이후에도 2년이나 더 계속되다가 휴전으로 막을 내렸다).
낙동강 방어(1950년 8월1일∼9월24일), 이 55일간의 총력전이 아니었더라면 부산 교두보는 지켜지지 않았고 반격작전도 없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전체가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분단 상황을 맞고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전전현사(戰前現史) 만이라도 확보한 것은 반세기 역사의 최대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총력전에 의한 낙동강 방어의 성공에 기인하였다.
패전 후 김일성은 "낙동강으로 진출시 부산에서 단 몇천명의 노동자만이라도 폭동을 일으켰더라면 반드시 부산까지 해방시켰을 것이다"라고 하며 남한에서 지하조직에 의한 인민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점을 패인으로 지적하였다. 말을 바꾸면 우리의 국민총화에 의해 실패하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