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때였다. 여러 후보자들이 제시했던 각종의 공약 가운데 우리 문화와 관련된 공약을 찾아보았지만,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대선 후 대통령직 인수위가 조직되어 여러 정책들이 논의되고 검토되고 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문화에 대한 직접적 안건들은 아예 언론보도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인수위가 가지고 있는 문화에 대한 관심의 질과 양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그러나 문화를 우리는 이렇게 우습게보아도 되겠는가? 대한민국 헌법 제9조에는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렇듯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은 국가를 이끌어나갈 사람들이 책임지어야 할 헌법적 가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문화의 계승과 창달’은 선언적 의미로 전락되고 있다. 이는 문화를 무의식중에 사치나 소비 정도로 인식하려는 천박성의 표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사실이라면, 이는 민족문화의 재난이며 국가적 위기일 수밖에 없다. 예로부터 나라의 등급… 문화수준과 비례해 조선왕조 후기 19세기를 살았던 다산 정약용은 나라의 등급을 생각할 때 문화를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문화의 정도에 따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구별했다. 이는 중화를 중원(中原)이란 지리적 특성과 한족(漢族)이라는 혈연을 기준으로 하여 제한해 왔던 종전의 사고방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주장이었다. 전통적 관념에서는 이적일 수밖에 없었던 탁발씨(拓拔氏)나 일본(日本)을 이적으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그는 문화를 기준 삼아 그들이 더 이상 이적이 아니라 이미 중화가 되었다고 넉넉히 평가해주었다. 그에게 있어서 조선은 물론 중화의 전통을 이어주는 존재였다. 그도 조선이 중화임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 전반기 우리가 국권을 상실했을 때, 독립을 지향하던 선조들은 치열하게 민족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그리고 위당 정인보, 민세 안재홍 선생 등과 같은 이들에게 민족운동을 전개하게 해 준 힘은 바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일제하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백범 김구 선생도 우리나라를 ‘문화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다. 문화는 잃었던 국권을 되찾을 수 있는 힘을 주기까지 했다. 한 나라의 국격은 경제력이나 국방력 등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리스는 유럽 공동체의 경제적 말썽꾸러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나라를 우리가 높게 평가해 주는 까닭은 그들의 문화전통이 찬란하고, 그 문화의 혜택을 함께 공유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독일이 존경받는 이유도 그들의 국방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 문화의 힘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한 나라의 국격을 논하는 데에는 반드시 문화라는 부분을 주목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문화의 가치를 몰라도 너무 몰라 문화는 이렇듯 한 나라의 국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준이다. 민족문화의 창달은 우리의 헌법적 가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대선 때에 나라 일을 맡아 보겠다고 나섰던 사람들 가운데 우리 문화의 계승과 창달을 위해 세금을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을 보지는 못했다. 그들 모두는 국민의 먹을거리를 해결하는 일과 국민을 편하게 해주는 일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국방을 위해 세금을 투자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가 우리 건강한 삶과 문화를 지키기 위해서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가치의 핵심인 건강하고 올바른 우리 문화를 국방과 대등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복지정책 가운데 문화복지에 대한 개념이 있는가를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필요한 정신적 양식인 문화에 대해서는 경제와 전혀 무관한 듯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국가는 민족사의 연구와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학이 아닌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의 정치론이 역사학의 기능을 잠식해도 되겠는가? 국가의 언어정책은 무엇이어야 하며 이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강화되어야 하나? 민족의 고전을 정리하고 번역하는 데에 드는 예산을 당장 두 배로 올린다 하여도 부족하다. 도서관정책에 획기적 변동을 가해서 문화의 핵심인 출판문화를 살리려는 정책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뉴질랜드와 같은 신생 국가의 경우에도 인구 5천의 도시에 어엿한 박물관이 있다. 그 나라는 결코 돈이 남아서 박물관과 같은 공공시설을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나타낸다. 정보통신사업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전통적 문화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시아의 청취자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들였던 ‘대장금’이란 연속극이 있었다. 이 극의 대본은 한글로 출판된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문 몇 줄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 전체 번역비의 몇 배를 벌어들였다. 복지나 국방뿐만 아니라 경제도, 그리고 교육도 문화와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는 언제나 마지막 장신구로 논의되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민족문화의 계승과 문화의 창달을 단순히 선언적 문구로만 해석해서는 아니 된다. 문화에는 소모적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문화가 결코 소모품에 그치지는 않고, 다른 창조적 생활이나 작업을 이끌어내는 창조의 원천이다. 국가는 문화에 관한 언급이 선언에 그치지 않음을 다시 분명히 선언하고 실천해야 한다.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 연세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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