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에 나오는 구절로 “집안이 화목해야 만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가훈처럼 강조해 왔으니, 누구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친숙하게 알고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우리들의 가정이 다른 나라 가정보다 더 화목하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화목’이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은 뒤집어보면 그만큼 불화와 갈등의 위험이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오늘의 우리사회에서는 부부가 불화하여 파탄을 일으키는 가정도 많고, 부모와 자식이 불화하여 서로 외면하는 가정도 적지 않다.
우리 사회의 대립과 분열……해묵은 유산
혼인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도 화목하기가 이렇게 어려운데, 한 나라가 화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은 국민인데도 지역이 다르고 경제여건이 다르고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비난하고 서로 경계하는 모습은 이제는 일상의 풍경이 되고 만 것 같다.
우리에게 이런 분열과 대립의 현상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조선사회를 뿌리까지 썩어들게 하였던 사색당쟁의 역사적 유산도 짊어지고 있으며, 남북이 이념으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학살극을 벌였던 우리 시대의 경험도 남아 있다. 그래도 부족하여 분열이 분열을 낳아가니, 지역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등등 끝없는 분열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치명적인 병리현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파가 다르면 서로 혼인도 안할 정도로 분열이 극심했던 조선사회에서는 그만큼 화합이 국가정책의 핵심과제로 강조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후기에 영조임금은 ‘탕평책’(蕩平策)을 내걸고 이쪽 당파와 저쪽 당파의 인물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갈등을 해소하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독점을 추구하는 이기적 탐욕은 독선에 빠진 종교적 신앙처럼 근원적으로 상대방을 인정하는 논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통합원리로 중국이 대제국을 통합시켜 유지하는 기본원리로 삼았던 것은 `춘추`에서 제시된 ‘대일통’(大一統)의 의리이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 두 사람의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대일통’ 의리는 절대적 권위를 지닌 하나의 중심을 세움으로써 봉건사회를 견고하게 유지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 사회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일통’의 세계질서 속에서, ‘대일통’을 표방하여 하나의 불변적 기준을 세워 봉건체제를 지키는 역할을 해 왔지만, 체제 내부의 분열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제 우리 사회에 ‘국민대통합’이라는 구호가 목청을 돋우고 있다. 지금 우리사회의 분열현상이 더 방치할 수 없는 위기상황에 이르렀다는 각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큰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대통합’을 내건 정부가 통합에 실패하고 공허한 구호만 외치다 마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국민대통합’의 길은 공론을 일으켜야 가능
우리시대는 너무 다양한 요구와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뒤엉켜 있으니 하나의 권위로 통합하는 ‘대일통’으로 통합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해관계가 대립된 양쪽에 떡을 나누어 주면 잠시 갈등이 가라앉는 듯 보여도 화합이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정치한다는 사람이 장바닥의 상인처럼 ‘공짜, 공짜’, ‘반값, 반값’하고 외치면서 대중의 욕심만 자극한다면 그것은 이미 통합의 길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의 눈길을 땅바닥의 이익을 찾는데서 끌어올려, 조금 높게 바라보고 조금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해야, 평행으로 달리는 대립된 시각의 소실점을 찾아낼 수 있고, 통합의 가치기준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6세기 후반 조선사회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당쟁이 처음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분열을 통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율곡(栗谷)은 통합의 기준을 ‘공론’(公論)이라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공론이란 나라의 생명력이다.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그 나라는 다스려지고, 공론이 민간에 있으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만약 위로 조정과 아래로 민간에 모두 공론이 없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였다. ‘공론’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한 견해이니, 대중의 다수의견을 의미하는 ‘여론’과는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한 나라의 통치자가 모든 국민이 공감하는 정당한 가치를 제시하여 실현해간다면 그 나라가 화합하여 잘 다스려지겠지만, 통치자가 공론을 제시하지 못하고, 백성들 속에서 공론을 제시하여 나라의 정치를 걱정하게 되는 단계라면 이미 그 나라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내려가서 통치자도 공론을 외면한 채 자신의 고집만 내세우고, 백성들도 공론을 외면한 채 제각기 욕심만 앞세운다면 이미 그 나라는 붕괴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율곡은 ‘공론’이 바로 국가가 지향해야할 가치기준인 ‘국시’(國是)임을 확인하면서, “인심이 모두 함께 그렇다고 하는 것이 ‘공론’이요, ‘공론’이 있는 곳이 ‘국시’이다. ‘국시’란 한 나라의 사람이 의논하지 않고도 함께 옳다고 하는 것이요, 이익으로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위엄으로 겁내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 역설하였다.
그 나라의 온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이상을 찾아내고, 지향해야할 목표를 확인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공론’이요 ‘국시’이니, 여기에서 ‘국민대통합’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쉬운 일이야 아니겠지만, 길을 제대로 찾아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