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 모두 법률 앞에서 평등하지만, 사람의 품격 곧 ‘인격’에서는 천평저울 위에 올려놓으면 지구보다 더 무거울 만큼 도량이 큰 ‘대인’에서부터 바람에 날려 다니는 낙엽 보다 더 가벼운 ‘소인’에 이르기까지 천차만별이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가 뇌물을 받고도 끝까지 잡아떼면서 버티는 광경이나 대중들 속에서 주폭(酒暴)·성폭행·무차별살상 등 온갖 가증스러운 범죄 기사들이 매일같이 신문지면을 더럽히고 있어서 우리가 사는 나라가 걱정스럽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사람들 가운데는 너무 탐욕스럽고 너무 파렴치하고 너무 잔인하여,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人面獸心)이라 질책해야할 실성한 인간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인간의 품격에는 인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無)인격’상태가 바닥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극한까지 내려가는 온갖 사악한 ‘악인’들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아무리 ‘악인’이라도 마음을 고쳐먹기만 하면 ‘대인’이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희망과 믿음 때문에 여전히 ‘악인’도 인간사회의 테두리 안에 품고 있는가 보다.
나라에는 ‘국격’이 있다
나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품격 곧 ‘국격’(國格)이 있다.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국제법 앞에서야 동등한 권리를 가지겠지만, 나라의 품격은 천차만별이 아닐 수 없다. 문학·철학·과학이나, 음악·미술·건축의 탁월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기술과 산업의 발달로 풍요롭고 안정된 사회질서를 이룬 문명한 선진국이 있는가 하면, 부패한 독재권력이 지배하면서 백성은 빈곤과 고통에 허덕이고, 내분과 내전에 시달리면서 좌절하고 있는 후진국도 많다.
그러나 후진국보다 더 사악한 나라는 사방으로 남의 나라에 가서 전쟁을 일삼으며 영토를 빼앗거나, 지배하고 약탈하는 나라이다. 이런 폭력적인 강대국이 바로 ‘악의 축’일 것이다.그런데 오늘날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대부분은 한 때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하면서 약탈하고 영토를 넓혔던 나라들이고, 후진국이라는 나라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가 되거나 영토를 빼앗겼던 나라들이다. 아예 병합되어 사라져버린 나라와 민족들도 많다.
그래도 이제는 식민지를 대부분 내놓았고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대국풍’의 나라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역사도 침략적 세력에 엄청난 고통을 겪은 시련의 역사이다. 고구려는 강대국인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을 잇달아 받아야 했고, 마침내 우리는 요동벌판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아득한 옛 영토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광막한 대륙을 말달리던 씩씩한 기상을 간직한 유일한 역사유물인 광개토대왕 비석도 이제는 남의 나라 땅을 찾아가서 둘러보아야 되는 처지이다. 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한번 오그라들고 나니, 사방의 이웃나라로부터 유린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쪽에서는 몽고족(元), 거란족(金), 여진족(淸)이 쉴 새 없이 침략해 왔고, 남쪽에서는 일본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일본은 이제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일본은 임진왜란 8년 전쟁동안 우리 강토를 초토화했고, 조선 말기에는 나라를 강탈하여 36년간 식민지로 지배했으니, 우리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묵은 원한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고집하고 잔혹한 약탈과 만행에 아무 죄책감도 보이지 않는 파렴치한 행태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있다.
지금도 일본은 분명히 경제대국으로 선진국의 대열에 서 있지만, 일본의 ‘국격’은 결코 ‘대국’(大國)이 아니라 여전히 왜소한 ‘왜국’(倭國)일 뿐이다. ‘대국’으로서의 품어주는 아량의 금도(襟度)가 전혀 없고, 남의 것이라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왜구(倭寇)의 근성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일본이 유교 문물에 순치된 것으로 인식하여 일본에 대한 신뢰감에서, “일본은 이제 근심할 것이 없다”고 말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이 아직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이기심에 빠져 있어, 그 ‘국격’이 왜소함을 보고 실망감에서, “일본은 이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일본을 갈 때마다 일본인의 친절하고 예의바른 태도와 거리가 깨끗하고 제품이 정교함을 무척이나 부러워했는데, 이제는 일본이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국가신용등급도 일본과 같아졌다고 하니, 남은 문제는 우리나라가 당당하게 대도(大道)를 내세우고 포용력이 있는 ‘대국’으로 국가의 품격을 높이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금년 말 새로 대통령에 당선되는 분이 부디 왜소한 일본과 맞서서 다투지 말고, 우리나라의 품격을 ‘대국’으로 높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국법이 제대로 시행되어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야 한다. 권력자에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국법을 무시하고서야 그 나라의 척추가 제대로 서지 못하는데 나라의 품격을 어떻게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나라의 품격을 세우지 못하면 일본만이 다른 나라들의 침략이나 무시를 다시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금장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