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메시지를 통해 사진이 날아왔다. 행사 초대장 사진이었다. ‘사도세자의 생애와 활동’, 6월 28일, 수원화성박물관. 웬 사도세자? 참, 그렇지. 250년 전 임오년(1762)은 정약용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지만, 사도세자가 죽은 해이기도 하다.
그 해 여름,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좁은 뒤주에 갇혀 8일만에 굶어 죽었다. 11살 세손 정조는 아비를 살려 달라 할아버지에게 애원했지만 현장에서 들려나오고 말았다. 사도세자는 답답함과 기갈과 모욕 속에 죽어갔다. 이른바 임오화변(壬午禍變). 이런 해괴하고도 충격적인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지금도 논란이 많다. 당쟁 속에 희생되었다는 설과 부자간의 성격갈등 때문이었다는 설 등이 있다.
아무튼 그 결과는 정조에게 큰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정조는 졸지에 죄인의 아들이 되어버렸다. 세습 군주국에서 죄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가? 불가론이 은밀히 유포되었다. 영조가 손자 정조를 이미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대를 잇게 한 것도 이를 염려해서였다. 종통(宗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러나
즉위 방해의 움직임을 극복하고 어렵게 왕위에 오른 정조에게 임오년의 문제는 어둡고 어려운 과제였다.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정조는 회피하지 않았다. 즉위 첫날 일성이 “오호,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아버지를 위한 복수, 즉 선전포고인가? 아니었다. 바로 이어 영조가 조치한 종통을 강조했다. 친부모인 사도세자와 혜경궁에 대한 추숭은 법적인 아버지인 효장세자와 법적인 어머니인 정순왕후보다는 낮게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더욱이 추숭논의를 제기하는 자는 형률로써 처벌하겠다고 못 박았다. 실제로 이 문제를 거론한 자를 처형했다.
왜? 주류인 노론의 힘이 두려워서? 과거사를 넘어 미래를 위해? 내 생각은 이렇다. 정조는 사도세자 건이 정치쟁점화 되는 것을 꺼렸다. 진상규명과 책임추궁을 회피한 것이다. 처벌 받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죄인이었든 직접 처벌한 할아버지 영조가 잘못이었든, 진상규명은 왕조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이다. 죄인의 아들, 또는 잘못 처분한 영조를 계승한 왕이 되어 정통성 시비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은 자칫 통제곤란·예측불허의 소모적 정쟁으로 발전할 수 있고,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다. 거론자의 진정성을 의심할 만했다. 또한 연산군 때와 같이 왕의 사사로운 복수로 전락할 수 있었다.
정조는 토역(討逆)과 추숭(追崇)을 분리하는 이중적·제한적 접근을 했다. 즉 진상규명을 수반하는 책임자처벌과 명예회복조치를 분리했다. 책임공방의 상황을 회피한 채, 관련자들이 줄어들고 진상에 대한 접근이 어려울 만큼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에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추숭을 통한 명예회복은 효심에서만이 아니라 정통성 시비, 즉 왕권에 대한 잠재적 도전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정조는 이러한 선제적 대응을 통해 즉위초기의 정국안정을 도모하고, 재위 2년에는 경장대고(更張大誥)를 선포해 국정 방향을 제시했다. 민산(民産)·인재(人材)·융정(戎政, 국방)·재용(財用)의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대고는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의 대강을 밝힌 것이었다.
- 통합지향적인 의제설정과 갈등전략을
16년이 지난 훗날 정조는 임오화변 관련자들이 다른 죄목으로 법망에 걸려들었을 때 가차 없이 처벌했노라고 회고했다. 한편, 사도세자의 추숭에 가장 비판적인 정파까지도 추숭의 단계적 진척에 일정한 역할을 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자칫 분열과 정치의 파탄을 불러올 이슈를 오히려 통합의 기회로 활용했던 것이다.
정치의 중요한 기능이 바로 의제설정이다. 정치적 의제는 정치공동체에 일정한 갈등구도를 조성한다. 어떤 의제, 어떤 갈등요인을 쟁점화 하느냐에 따라 소모적 정쟁과 분열이 초래될 수도 있고, 생산적 정치와 통합에 기여할 수도 있다. 오늘날 정파적 관점과 근시안적 안목에서 갈등을 이슈화하여 사회의 분열과 반목을 낳는 것을 종종 본다. 정조의 통합지향적 갈등전략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정치적 의제가 설정되는 중요한 기회다. 의제는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747과 같은 허황된 구호는 곤란하다. 공공성과 책임의식에 기초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정치 참여를 수반하고 조직화를 통해 뒷받침되는 것이어야 한다. 다만 이런 과제는 정당이 주도적 구실을 해야할 텐데, 그걸 기대하기에는 기존 정당이 썩 미덥지 못한 실정이다.
/다산연구소 김태희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