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이다. 아무리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 샘물이다.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수도 없이 우려먹어도 고갈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매 한가지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나 형제자매 간의 사랑도 있고 사제 간의 사랑이나 친구 간의 사랑도 있다. 자연풍광이나 동식물에 대한 사랑도 있고 학문이나 예술에 대한 사랑도 있다. 돌이나 자동차 혹은 가방과 같은 사물에 대한 사랑도 있다. 조국사랑, 고향사랑, 학교사랑 같은 것도 있다. 이웃사랑도 있고 초인(완전자)에 대한 사랑도 있다. 그러나 역시 사랑의 주종은 남녀 간의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불가능하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에 대한 정의는 수도 없이 많이 내려져 왔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완전한 대답은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일면적인 해답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은 그것이 무어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랑을 잘도 하고 있다. ‘무엇을 할 줄 안다’는 것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체험을 통한 ‘사랑의 현상학’ ― 우리는 다만 그것을 서술할 수 있고 이해하며 공감할 수 있다. 사랑은 아름답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이 최고의 존재로 보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남자로 보이고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 이외의 존재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사람만이 마음에 가득 차 버려서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어진다.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이 보이고 다른 것에는 눈멀어 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맹목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의 거울이다. 사랑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 그러니까 거울에 비친 모습에 부응하고 싶어 한다. 더 멋있고 유능해지기 위하여 노력한다. 이러한 현상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마침내 그 이전의 자기보다 더 발전하고 성숙한 존재가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은 사랑의 힘으로 각자의 완전성을 향해 일보일보 전진하게 된다. 마침내 두 사람은 각각 자기 개성의 완성을 이루고 두 사람의 인격영역이 피차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 가진 위대성이다. 남자와 여자는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동안에는 절실히 열렬하게 몰아지경이 된다. 그러나 사랑도 변할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다. 사랑이 없어졌을 때 사랑의 위대성도 소멸한다. 그렇게도 아름답게 보이던 상대방이 밉살스럽게 보이고, 상대방이 바라는 대로 되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되고자 한다. 사랑함으로써 더 고차적으로 되었던 나 자신이 그 이전의 나로 추락한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연애와 결혼에서 본다. 파스칼은 “연애는 아름다운 오해이고, 결혼은 참담한 이해이다”라고 설파한다. 사랑에는 이별이 뒤따른다. 이별은 질병보다 더 큰 고통을 가져오고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을 몰고 온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으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득함과 끝없이 허전한 가슴으로 이는 찬바람의 냉기를 앓아야 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더 많이 아파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가장 큰 아픔을 맛보아야 한다. 사랑의 상실은 곧 의미의 상실이며 자존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사랑의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순응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사랑의 상실은 더욱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반응하는 방식도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혼자 괴로워하면서 차츰 순응하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에 집착하면서 배신감을 이겨내지 못해서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치정에 의한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이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자기파멸로 끝이 나고 만다. 그러나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고 자기 극복을 하는 자에겐 보다 큰 성숙이 뒤따르고 새 삶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사랑의 상실로서의 이별은 또한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이별은 반드시 새로운 사랑을 소리 없이 몰고 온다. 그것은 살을 에는 겨울바람을 몰아내는 봄의 훈풍과 비슷하다. 이별의 극심했던 고통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사라지고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 새로운 사랑이 올 때 묵은 사랑이나 고통은 소리 없이 퇴색하여 사라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랑은 늘 첫사랑이 된다. 적어도 그 사랑이 진실하고 절실하다면 반드시 첫사랑과 같은 희열과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람은 일생에 걸쳐서 여러 번의 첫사랑을 하게 되는 존재이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이 반드시 성적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변하고 순환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염원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희구이다. 사랑은 살아있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변화한다. 생명은 탄생⇒성장⇒쇠퇴⇒소멸의 과정을 걸어간다. 죽은 자는 정지하여 있지만 산자(생명)는 변화한다. 사랑의 감정은 살아있는 감정이므로 변화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랑은 죽음을 벗어나 있는 자, 즉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파스칼은 사랑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20년 전에 사랑했던 그녀를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20년 전의 그녀가 아니고 그 또한 20년 전의 그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강제될 수도 욕구될 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랑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사랑하라’고 강요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이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나에게 주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스스로 마음을 주고 싶어 하는 경향이 양방향에서 생겨날 때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순수한 이타심이다. 아무 조건 없이 상대방에게 베풀고 싶은 호의이다. 상대방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상대방의 뒤에 숨어서 잘 해주고 싶은 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그를 위해 내 몸을 바치고 싶은 헌신의지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사랑이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줌으로써 얻게 되는 희열이고 자기만족이다. 사랑은 그 경향상 온전히 차지하려고 한다. 나 혼자만이 상대방을 사랑해야 하고 상대방도 나만을 사랑해야 한다. 나만이 상대방의 것이고 상대방만이 나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남자’ 또는 ‘나의 여자’라는 말이나, 아니면 ‘당신의 남자’, ‘당신의 여자’라는 말을 어색하지 않게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욕은 사랑의 본질도 아니고 실제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하게 소유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사물이 아니며 각각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단지 남녀 간의 사랑에는 독점욕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뿐이다. 이러한 독점욕도 다른 한편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독점욕을 보이지 않는 사랑은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다. 독점욕을 보여야만 상대방은 사랑을 확인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독점욕이 가지는 부정적 측면은 대단히 심각하다. 상대방을 구속함으로써 인격적 자유를 말살하게 된다. 이 때 상대방은 노예로 전락하게 되고 더 이상 사랑이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상대방에게 독점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 지속되는 한 사랑은 존속한다. 사랑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득과 실을 넘어서 있다. 소유하려고 하는 경향이 기초가 되는 천박한 사랑에서의 실연은 불행이다. 그러나 깊이 사랑하여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은 불행이 아니라 환희이다. 따라서 사랑은 상식적인 행복이나 불행의 저편에 있다. 사랑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일상적인 행ㆍ불행이 아니라 ‘사랑 속에서 생겨나는 자율적 가치감정’인 것이다. 우정은 지성을 기준으로 하고 사랑은 정감을 주조로 한다. 지성의 지나친 명석함은 연애를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위기를 내포한다. 연애는 지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감을 주조로 하기 때문이다. 연애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간에 사랑의 정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의 적격자는 이성보다 감성이 풍부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질투이다. 질투는 물론 사랑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태의 여러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에서 생기는 질투가 가장 대표적인 질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강렬한 감정인만큼 거기에 비례하여 질투 또한 매우 강렬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질투 자체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손상된 자존심에 대한 일종의 방어행위이다. 문제는 질투의 표출양상과 그것이 몰고 오는 영향력이다. 질투에 매몰되어 있을 때 인간은 황폐화 되지만 극복했을 때는 보다 성숙한 제2의 자기를 형성하게 되어 높은 인격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 다른 목적이 없어야 한다. 다른 목적이 있을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타산이며 책략이 된다. 따라서 순수한 사랑이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을 의미한다. 사랑 앞에서 고뇌하는 실존이 취할 지혜로운 태도는 정감의 수위 조절하기라 할 수 있다. 알맞게 좋아하고 알맞게 기대하기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처음과 같이 변화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시간의 경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그 사람의 모두를 수용하기이다. 남녀 간의 사랑은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의의다. 싹이 열매로 성취됨이요, 궁극적 자기가치이고 인간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이다. 비실용적이지만 그러나 우리 생애의 광채이다. 칠곡문협 회원인 박상희 시인은 사랑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형상화 하고 있다. 수필가이기도 한 박상희 시인은 소위 전국구 작가이다. 왜관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국의 각종 문학단체의 중책들을 여러 가지 맡아서 이끌어 가고 있는 사람이다. 여류로서 이만한 역량과 활동성을 가진 시인은 한국문단 전체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사랑이란 싹이 트는 날부터 그리움도 외로움도 함께 싹이 트더니 사랑한 만큼 그리움도 자라 외로움과 친구 하더라 사랑한 만큼 그리움이 커가고 사랑한 만큼 외로움은 숲이 되더라 ― 박상희 「사랑이란」 전문 시인은 사랑을 정의한다.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혹은 법률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ㆍ감성적으로 정의한다. 시인은 봄의 새싹과 잎과 꽃을 보면서 혹은 나무와 숲을 보면서 사랑을 느끼고 파악한다. 하찮은 미물들의 꿈틀거림 속에서도 시인은 사랑을 찾아낸다. 시인의 눈에는 삼라만상이 사랑 속에 있고 사랑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밝게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의 눈은 사랑의 눈이다. 역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은 곧 시인의 눈이 된다. 사랑에는 기쁨과 함께 고뇌가 따른다. 사랑하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 사람 생각만을 할 수 있는 것은 기쁨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불운이 닥치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염려는 고뇌가 된다. 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그에 대한 극진한 염려가 되고 그것은 나의 고뇌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고뇌도 깊어진다. 그리움과 외로움 또한 고뇌의 일종이다. 시인은 사랑의 순환을 이야기 한다. 나무의 싹이 트고 그 싹이 자라나 숲이 되듯이 사랑 또한 그러한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사랑의 싹에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내재되어 있다. 외로움을 느낄 때 사랑이 생기고 사랑이 생겨날 때 그리움이 생겨난다. 사랑은 어쩌면 외로움과 그리움을 자양분으로 하여 싹이 트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진전되면서 그리움이 자라나 외로움으로 이행한다. 시인은 이를 “사랑한 만큼/그리움도 자라/외로움과 친구 하더라”고 한다. 사랑하게 되면 자꾸 보고 싶어지고 함께 있고 싶어진다. 그러나 막상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사랑의 감정이 퇴색된다. 그러나 보고 싶은 사람을 자주 볼 수 없는 경우에 사랑은 더욱 절실해진다. 오래 보지 못할수록 그리움은 강화된다. 그리움이 가슴을 저미는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문득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외롭기에 더욱 그리워하게 되고 그립기에 더욱 외로워지는 것이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상호 상승작용을 한다. 이 단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사랑한 만큼/그리움이 커가고/사랑한 만큼/외로움은 숲이 되더라”고 한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사랑과 정비례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그립고 많이 사랑하면 많이 외롭다는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과 외로움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동일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뜨거운 것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슬픈 것이다. 사랑의 순환을 시인은 그렇게 보고 있다. 박상희 시인은 사랑의 복잡한 현상을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두 가지 감정으로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3연에 불과한 짧은 시 한 편으로 시인은 사랑의 본질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시인의 장기이다. 철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시는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철학자의 상위에 자리 잡고 있는 존재이다. 시인은 위대하다./김주완 前대구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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