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왜관면 매원동(현 왜관읍 매원리)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 상보 이승해 선생 이름으로 장학회가 전국 최초로 설립, 관심을 끌고 있다.
상보 이승해(1903∼1957) 선생의 아들 이언식(77·대구 북구 읍내동) 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항일독립투사 상보(常普) 장학회` 설립을 위해 사업을 정리하고 남은 재산 중 3억원을 장학재단 기금으로 내놓기로 하고 200억원의 장학기금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언식씨는 "16살 소년 시절부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역의 불우한 학생들을 돕고 싶다"며 "장학재단 출범식과 기금 마련 행사를 오는 3월 3일 오후 3시 대구 북구문화예술회관 공연관에서 개최한다"고 밝혔다.
상보 이승해 선생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서울 중동학교 재학중 항일 학생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검거, 퇴학처분을 당하고 낙향해 애국계몽운동을 하던중에도 서울에 자주 왕래했다고 한다.
유추해 보면 서울의 항일 정보원과 극비리 접선을 통하여 정보제공을 함으로써 1939년 대구지방검찰청 형사 사건부 829호에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왜관면 매원동 광주이씨가 항일운동에 대거 참여, 국권 회복 운동에 선봉에 서서 활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승해 선생은 낙향한 후에도 계속 독립운동자금을 댔으나 일본 경찰에 모진 고문을 당했던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다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언식씨는 아버지가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시절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 박사, 전진한 전 사회부 장관, 변영태 전 외무부 장관 등 10여 명과 한복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찍은 사진을 찾았다. 안호상 박사의 후손을 통해 아버지가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처분을 당했다는 증언도 들었다.
또 1939년 아버지가 경북 칠곡의 한 사유림에서 나무를 몰래 베어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대다 붙잡혔다는 사실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지검 형사 사건부 서류도 입수하는 등 전국을 누비며 아버지에 대한 기록과 증언을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연보로 기록할 수 있게 된 가운데 아버지의 이름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