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 중앙종친회에서 편지가 왔었다. 열어보니 지난해 10월14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시조 공「고운 최치원」중국 제향(祭享)과 국제학술대회가 있으니 함께 가자는 안내서였다. 학생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평소 일가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며 모내기 때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종친회가시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영향인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약 15억 인구가 사는 중국에 외국인 동상이 한분뿐인「고운」할아버지의 동상참배, 영수탑(永壽塔)과 양주「고운 최치원」기념관, 근무했던 옛 관아(遺地)와 다니셨던 옛길, 등 영혼이 살아 있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유적지현장을 보고 싶고, 학술대회에 참석해 식견도 넓히기 위해 학사일정을 조정하더라도 동행하기로 결심했다. 중국과 고운 할아버지에 대한 자료를 정리해 보았다.
중국은 크게는 16개 부족국가이고 작게는 56개 부족(민족)국가이다, 한족(漢族)이 93%이고 7%가 이민족(異民族)이다. 중국의 땅 넓이는 약960만㎢이며 우리나라, 남북한의 44배이고 남한의 약100배정도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대국이다. 중국의 실제인구를 파악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고 한다. 2010년 정부공식통계는 13억3861만명(세계인구의 19.8%)으로 세계 1위국이다. 1979년 인구정책에 따라 등록되지 않는 흑구(黑口, 헤이커우)를 합하면 세계인구의 22.7%인 약15억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의 영토는 위도 상에서 보면, 북으로 막하(漠河)이북의 흑룡강(黑龍江)성의 성도(城都)의 중심선인 북위 53˚선에서, 남으로 북위 4˚부근 남사군도(南沙群島)의 증모암사(曾母暗沙)에 위치하고 있다. 남북 간의 위도 차는 약 50˚나 되며, 그 직선거리는 약 5,500㎞에 이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420km정도이니깐 무려 10배가 넘는 그야말로 대국이다.
경도 상에서 보면, 동으로는 흑룡강과 우수리강(烏蘇里江)이 만나는 지점인 동경 73˚선에서, 서로는 신강(新疆) 위글자치구 서부의 파미르고원(帕米爾高原, Parmir Plateau)부근의 동경 135˚선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의 경도차는 62˚이고, 그 거리도 무려 약 5,200㎞이며, 시차는 4시간이상 벌어진다.
한국과 중국은 북경을 기준으로 1시간 시차라고 볼 때, 동부의 우수리강에서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이라면 서부의 파미르고원은 아직도 별들이 총총하고 깜깜한 한 밤중인 것이다. 중국의 내륙 국경선은 약 22,800㎞로써, 북한, 러시아 등 15개국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인접 국가는 한국 일본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폴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방글라데시 등이 있다.
고운 할아버지에 관한 중앙종친회자료에 의하면 최치원(崔致遠, 857년~?)은 신라 말기의 문장가요 학자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신라의 경주 사량부에서 857년 최견일(崔肩逸)의 아들로 탄생했다. 12세(868년, 경문왕8년)나이로 당나라 유학을 떠나 6년만인 18세인 874년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후 2년간 낙양(洛陽)을 유랑하면서 시작(詩作)활동에 몰두하였다. 876년 선주 율수현위(宣州 溧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 후 양저우 지방으로 벼슬을 제수 받았고 황소의 난 당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었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학 떠난 지 17년 만인 885년 음력 10월 귀국해서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 태산(太山 : 지금의 전북태인)등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 진성여왕에게 구체적인 개혁안으로 시무(時務)10조(條)를 상소해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 잡고자 하였다.
시무책이 받아져서 6두품 신분의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湌)이 되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거센 반발로 인하여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나는 중국에 가기 전날 10월13일 밤 고운 할아버지가 중국 관리로 9년간 근무한 후 떠나 온지 정확하게 1126년 만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어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마치 초등학교 때 소풍가는 기분이었다. 14일 아침 들 뜬 기분으로 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평소와 달리 안개가 자욱하였다.
14일 10시경 6년 연속 세계 최고공항인 인천공항에 도착하니까 우리문중의 얼굴격인 동양 최고의 석학인 성균관 최근덕 관장님, 한 가문이 부(富)를 300여년을 이어온 세계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상징인 경주 최 부자 집의 직계 손이자, 종친회장을 역임하신 최염명예회장님 등 각처(各處)에서 온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여권을 맡기고 명찰을 받고 간단한 출국심사를 마치고 아시아나(oz349)편으로 2시간 만에 남경공항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버스를 타고 고운 시조공이 근무했던 꿈에 그리던 양주시를 향해 갔다. 창밖을 보면서 고운할아버지 동상을 광화문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장군상을 생각하며 어떤 모습일까? 또 기념관은…. 이런 저런 상념(想念)에 잠겼다.
1호차 남자 가이드가 중국의 3대 불가사이가 첫째, 땅이 넓어서 평생 살아도 다 돌아보지 못하고 둘째, 한자공부는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우고 셋째, 죽는 날까지 먹어도 다 못 먹어 보는 게 중국요리이고, 중국을 더 쉽게 설명하자면 100년 전 옛사람과 세계화된 현대인이 함께 사는 곳이고, 같은 중국인도 통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계3대 불가사이라는 만리장성은 진나라 때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고 쌓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십 년 전에 보았던 만리장성을 생각하며 중장비도 없던 그 옛날에 저 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고 어려움이 있었을까 상상하니 놀랍기만 하다.
또한 중국인은 대국(大國)적인 기질이 있어 외국인을 잘 인정하지 않기에 외국인 동상은 신라인 고운 최치원한분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번에 장보고 (청해진의 해상왕)한 분이 더 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신라인으로 보는데 중국에서는 중국 변방 족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최남선은 장보고를 ‘東方 海王’(日千百年前東方海王新羅淸海鎭大使張保皐)이라 했고, E.O. Reischauer교수는 `해양상업제국의 무역왕‘ 으로 보았지만 蒲生京子교수는 ’노예상인‘(新羅末期の 張保皐の擡頭と反亂,『朝鮮史硏究會論文集』16, 朝鮮史硏究會, 1979)으로 논하고 있다.
도착 다음 날인 15일 오전 9시경 양주 기념관으로 걸어갈 때 가슴이 벅 차 올랐다. 그간 고생하신 영건 수석부회장에 의하면 2001년 제1회 때는 남경공항에서 양주까지 가는 곳마다 경찰의 호위를 받고 농악대의 가장행렬이 있었고 5회 대회까지는 대단했었다는 기분 좋은 얘기를 들으면서 도착했다.
기념관을 보는 순간 계원필경집을 집필하시는 모습이 불현듯 뇌리를 스쳐갔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은 약관 22세인 879년에 펴낸 문집(文集)이다. 20권 4책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20대 초반에 쓰신 고운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내공봉시절에 쓴『계원필경집』1부 20권의 중요 부분 한글로 풀어보면 淮南에서 入本國에 兼送詔書等使인 前都統巡官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 賜紫金魚袋 臣 崔致遠은 進所著雜詩賦及表奏集二十八卷호대 具錄如後하노이다.
회남(淮南)에서 本國으로 들어올 적에 조서등사(詔書等使)를 겸하여 보내 주신 전 도통순관(都統巡官)과 승무랑(承務郞)과 시어사(侍御史)와 내공봉(內供奉)을 지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은 신(臣)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리는데 갖추어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이 합니다.
私試今體賦五首一卷 五言七言今體詩共一百首一券 雜詩賦共三十首一卷 中山覆簣集一部五券 桂苑筆耕集一部二十卷 사시금체부 5수 1권 오언 칠언 금체시 모두 100수 1권 잡시부 모두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이다.
右는 臣自年十二로 離家西泛이라 當乘桴之際하야 亡父誡之曰 十年에 不第進士면 則勿謂吾兒하라 吾亦不謂有兒라호라라 往矣勤哉하야 無隳乃力이어다하야늘 臣이佩服嚴訓 하야 不敢弭忘懸刺하야無遑冀諧養志하야 實得人百之己千之라 觀光六年에 金名牓尾호니 此時諷詠情性하야 寓物名篇을 曰賦曰詩라호니 幾溢箱篋이나 但以童子篆刻으로 壯夫所慙이러하다.
위에 열거한 문장들은 제가 나이 열두 살 때 집을 떠나 배를 타고 서쪽으로 올 때부터의 것입니다. 배를 탈 즈음을 당하여 죽은 저의 아비가 경계하기를 “10년 동안에 진사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말하지 말라. 나 또한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라에 가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너의 힘을 무너뜨리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아비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어 감히 현자(懸刺)하는 노력을 쉬거나 잊지 않았습니다. 겸하기를 희망하고 뜻을 기를 겨를이 없어서, 실로 남들이 백 번하면 저는 천 번 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공부를 한 지 6년 만에 합격했다는 이름이 방의 맨 끝에 붙었으니, 이때에 정성(情性)을 시로 읊고, 사물에 생각을 표현한 시편의 이름을 지어서 부라는 명칭을 붙이고, 시라는 명칭도 붙인 것이 보관한 상자에 넘칠 정도로 많게 되었습니다. 다만 동자(童子)의 전각(篆刻) 같아서 장부라면 짓기를 부끄러워하는 것들입니다.
及罷微秩하고 從職淮南에 蒙高侍中專委筆硯이라 軍書輻至나 竭力抵當하야 思十用心이 萬有餘首 라然이나 淘之汰之하야 十無一二나 敢比披沙見寶리오마는 粗勝毁瓦畵墁일새 遂勒成桂苑集二十卷호이다.
그 조그마한 관질(官秩)을 그만두고 회남(淮南) 지역에서 관직에 종사할 때에 고시중(高侍中)이 문장에 관한 일을 전적으로 위임을 하여 주었습니다. 그 때에 군사에 관한 서류들이 집중적으로 몰려들었으나 힘을 다해서 감당해냈으며, 4년 동안 마음을 두고 노력한 것이 만(萬)여 수나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가려내어 버렸기 때문에 보존한 것이 10분의 1,2도 되지 못했으나 감히 제가 가지고 있는 시를 모래를 헤치고 보배를 찾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런 대로 망가진 기와와 그어진 벽장식처럼 못쓰게 된 것보다는 낫기에 드디어 『계원집(桂苑集)』20권을 만들었습니다.
15일 10시경 제향을 지켜보니까 대학시절 성균관 석존대제보다 더 차분하게 체계적으로 지내는 우리 집행부가 너무 훌륭하게 보였다. 제향을 올린 후 11시경 한, 중 행사가 진행되었다. 통역하는 형려국교수가 대학후배여서 아주 반가웠다. 중국식 인사말 따자 하 오! 로 시작되는 최시중회장 축사를 필자가 대독하였다.
12시경 양주시 주관 오찬행사 후 옛 관아(遺地)방문을 했는데 그 자리엔 구두공장으로 변해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자주 다니셨다는 옛길에 갔을 때는 주변에 공사 중으로 어수선했었다, 그 후 영수탑, 동상 참배 등 밤늦게 까지 다녔다. 광화문동상을 상상했던 필자는 순간 기대에 못 미쳐 울꺽했었지만 돌아서면서 ‘후손의 욕심’이지! 이것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하고 마음을 돌렸다.
늦은 밤 돌아오면서 ‘매사에 감사하라’는 부모님말씀이 생각났다. 매사에 감사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이 부모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돌아보면 오늘날 우리가 잘 사는 게 훌륭한 조상님 음덕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을 다녀오면서 한국인 특히 경주최씨 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참관기를 한마디로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고 하고 싶다, 부끄럽게도 한국엔 시조 공의 기념관이 없는데 세계 제일의 문화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 15억의 인구가 약 1100여 년 전, 9년간 관리로 근무했던 외국인을 신(神)같이 모시고 있는데 가슴이 저려오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기념관을 다녀간 주요인사는 전두환 전 대통령내외분, 강영훈󰋯이수성 전 국무총리, 이상희 전 장관님 등 수없이 많다. 기념관을 둘러보면 한국인이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금방알 수 있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주게끔 한번 다녀오라고 하고 싶다.
고운 할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경륜도 짧은 약관에 머리가 얼마나 좋고 공부를 많이 하셨기에 그 많은 양의 글을 어쩌면 그렇게도 잘 쓸 수 있습니까? 명색이 필자도 교수이고 후손답게 중2때 경북도내 중, 고등부대회에서「제목 : 점과 선」최우수상을 수상했었습니다. 그 후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어 전공「정책학」은 아니지만 중견 문인으로 한 때는 대학에서 동양문학을 강의했었습니다. 읽을수록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선배문인이자, 대학자이신 할아버지께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중국 관계자분들께! 한-중 문화를 사랑하고 동양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한, 중 문화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해가는 양주시장님을 비롯한 관계자여러분! 기념관을 신축하고 유적을 발굴 관리하는 정성에 후손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학술대회에 참여해 주신 학자님들께! 한 인간(최치원)의 철학사상으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국제학술대회를 세계적인 명문 북경대학에서 개최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공사다망한 가운데「고운」의 학문세계를 다각도로 연구해 주신 중국 측 교수(강욱, 교청거, 왕박, 위상해, 형려국)님과 한국 측 교수(오석원, 장일규, 조범환, 최영성, 최영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학술대회발전에 큰 언덕이 되어 주신 최근덕성균관장님과 행사전반을 위해 노고가 많으신 최진석교수님과 사업회 임원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중국에 기념관을 둘러보고 제향10주년행사의 역사적 현장을 지켜보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참 고생 많았구나,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라는 위로와 격려의 큰 박수를 보냅니다. 그간 한, 중 우호협력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참관기를 쓰면서 부족함을 통감합니다. 고운할아버지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건강과 가정과 하시는 일에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최도열 백석대 교수 행정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