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대법원 12·12와 5·18 재판에서 판시 10·26 사건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12·12 사태를 결과적으로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탈취라는 정치적인 해석에 그쳐서는 안된다. 하나회의 대부인 전두환이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될 경우 하나회마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만큼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정승화 긴급 체포를 시작으로 강행한 군사반란의 `선제 카드`를 뽑아든 역사적 사실부터 바로 세워야 하리라. ▶전두환 하나회와 악연의 출발···군사반란 계획은 언제부터?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정우성(극중 이태신 역·실재 인물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의 이 대사는 1979년 10·26 직후 벌어진 12·12 군사반란(쿠데타) 시 장태완 장군의 꼿꼿한 군인정신을 그대로 표현한 직설이다. 영화 `서울의 봄`이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칠곡의 봄`이 오기 전인 1982년 2월 9일 영화 속 이태신의 실존 인물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소장)의 아들이 경북 칠곡군 낙동강 기슭 조부 묘소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나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흥행하면서 장태완 장군이 목숨을 걸고 나라와 국민을 지키려한 참군인이라는 사실이 확산되자 그의 가족이 재조명되고 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1931년 9월 13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동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978년 2월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이 합쳐져 구미시로 승격함에 따라 구미시 신동 520번지(구미시 인동65길 78-41) 주소와 함께 구미시로 편입됐다. 장태완은 그후 대구상고(24회)를 졸업하고,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육군종합학교에 지원해 11기로 임관했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거의 총알받이로 취급했던 육군종합학교 소위 가운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장교였다. 중령 시절에는 맹호부대 1진으로 베트남에 파병됐으며, 1971년 1월 준장으로 진급했다. 1973년 4월 윤필용 사건 이후의 근위부대 내 물갈이 덕에 비육사 출신임에도 핵심 보직인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에 발탁됐다. 당시 비(非)하나회 갑종간부 출신인 자신을 깔보고 반항하던 육사 15기 출신 김상구 방공포대대장을 영창 보낸 사건으로 장태완은 군부에서 주목받는다. 영창을 가면서 군복을 벗은 김상구의 손윗 동서로서 하나회를 이끌던 전두환이 장태완에게 악감정을 품게 됐고, 이때부터 하나회와 악연이 시작됐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은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하나회 세력의 중심인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소장)을 견제하기 위해 1979년 11월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발령 냈다. 전두환의 하나회가 일으킨 12·12 쿠데타가 있기 불과 26일 전이었다. 전두환이 이끈 신군부가 군사반란 디데이를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것은 계엄사령관을 맡은 정승화 총장이 1979년 겨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보낸다는 계획이 새나가 선제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전두환 사령관의 전보를 반대했다. 전두환은 10·26사태에 연루된 혐의로 이날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승인 없이 정 총장을 불법 체포하고, 하나회를 앞세워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따라서 10·26 사건의 연장선에서 발생한 12·12 사태를 결과적으로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탈취라는 정치적인 해석에 그쳐서는 안된다. 하나회의 대부인 전두환이 동해경비사령관으로 좌천될 경우 하나회마저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만큼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정승화 긴급 체포를 시작으로 강행한 군사반란의 `선제 카드`를 뽑아든 역사적 사실부터 바로 세워야 하리라.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1979년 12월 12일 저녁 전두환은 드디어 작전을 개시했다. 작전명은 `생일집 잔치`였다. 군사반란에 동참하기로 한 하나회 소속 지휘관들은 경복궁 옆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단장 장세동 대령)에 집결했다. 당시 옛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서울 방위의 정예부대로 수경사 소속이었지만 수경사령관도 무장 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립적인 부대였기에 이들이 몰래 모여 모의하기에 딱 좋은 장소였다.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 허삼수·우경윤 대령 등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을 진행했다.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경사 33헌병대 50명을 투입했다. 33헌병대 병력은 정 총장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했으며, 정 총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12·12 군사반란 시 정병주 특전사령관(부하가 쏜 총탄을 맞고 체포), 김진기 육군본부 헌병감, 하소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등과 하나회 신군부에 저항하면서 병력을 동원해 쿠데타를 끝까지 진압하려 한 장군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 소속 장교 450여 명 가운데 자리를 지킨 사람은 60여 명에 그쳤다고 한다. 나머지 장교는 대부분 하나회와 내통하면서 반란군에 가담하거나 자리를 비웠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 그러나 전두환·장세동(수경사 제30경비단장) 등의 하나회 지시를 따르는 대다수 수경사 장병들은 최고 직속상관인 장태완 수경사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배반한 결과 장 사령관은 반란군에게 체포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 `서울의 봄` 김성수 감독은 "사실 그분들이 끝까지 맞섰기 때문에 전두환과 그의 패거리들의 범죄가 내란죄와 반란죄로 입증된 것이다. 아무도 그들과 맞서지 않았다면 아마 역사에서 그들이 승리자로 영원히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가슴에 묻다 장태완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두 달간 문초를 당했고, 1980년 2월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된 후 가택연금을 2년간(6개월이라고도 함) 당하는 등 고초를 겪은 바 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본 후 충격으로 곡기를 끊고 술(막걸리)로 시름을 달래다가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부친은 "내가 그놈(아들 장태완) 죽는 꼴 보기 전에 내가 먼저 죽어야지"라며 생사의 기로에서 아들을 가슴에 먼저 묻은 것으로 보인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장 소장의 아들(당시 20세)은 1982년 1월 학교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연락이 끊겼다. 한 달 후인 2월 9일 장 소장의 고향인 칠곡군 낙동강 기슭 조부 묘소 옆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 소장은 꽁꽁 언 아들을 끌어안고 "얼굴이 너무나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제 어미한테 그 참혹한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었다. 제가 입김으로 녹이면서 혀와 침으로 얼굴을 씻어 내니 아들의 눈에서 사탕만한 얼음 덩어리가 내 입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 놈이 마지막까지 이 세상을 원망하고 가는 눈물`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열했다. 장 소장은 "오늘날까지 제 가슴에 수만 개의 못이 되어져 있다"고 갈기갈기 찢어지는 심경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아들의 묘비에 직접 글을 새겼다. "여기 채 못다 핀 한 송이 꽃이 최고의 선을 위해 최대의 인고로 향학하다 수석의 영예를 안고 1982년 4월의 짧은 인생을 마치고 고이 잠들다. 내 생명보다 소중한 성호를 사랑의 품으로 인도하여 영생토록 해주십시오." 장태완 아들이 숨진 채 발견된 곳은 할아버지 묘지 옆이다. 그래서 장 장군은 평소 아버지와 아들은 자신이 죽였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장 소장의 부인 이모 여사는 "우리가 역모를 꾸민 것도 아니고, 옳은 일을 하고도 왜 이렇게 집이 불행하고 참담하게 되어 온 식구가 죽네 마네 이런 걸 생각하면 이 세상이 원망스럽고 세상이 폭발해서 없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그쪽에서 회유할 때 그쪽에 가 있으면 호의호식하고 가족도 잘 지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 이 집구석이 이렇게 되었다고 제가 농담을 한 적이 있다"고 개탄했다. 세상이 폭발하기를 바랬을 정도로 하루하루 고비를 넘겨 온 부인 이씨(당시 77세)도 장 소장 사망 2년 후인 2012년 1월 자신이 살던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해 유명을 달리했다. 평소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씨는 아들이 그토록 보고 싶었나 보다. 장 소장은 아들 묘소에 갈 때마다 오열하는 부인을 보고 "죽으면 계속 (아들을) 볼 것인데 왜 그러냐"고 위로하기도 했다. ▶`서울의 봄`을 타고 `칠곡의 봄`으로 장태완 장군은 "국민은 12·12의 역사와 쿠데타에 대한 진상을 알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국가의 궁극적 반란 진압의 책임은 헌법상 대통령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장군은 "군의 최고 가치는 국가가 요구할 때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생명은 둘이 아니다. 그 생명을 바칠 기회가 없을 적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해야 한다. 그것은 국방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다. 쿠데타하는 것이 군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쿠데타(군사반란)는 특정 세력이 무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전복하고 비합법적으로 통치권 장악을 시도하는 일종의 국가 반역 행위다. 요컨대 12·12는 하나회의 핵심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신군부가 하극상에 의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1995년 문민정부에 의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함께 구속기소됐다.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상관살해,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목적살인 등이다. 전두환은 1심에서 사형을,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법률이 전두환 등의 하나회가 일으킨 12·12사태가 쿠데타인 것을 증명했다. 장태완 장군이 지적한 대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군사 임무에만 충실해야 할 군인이 정치적 야망과 권력욕을 품고 군부 내에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결성해 군사반란를 일으켜 정권을 찬탈한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 총구에서 나오는 권력 막아야 서울지검 공안1부는 1995년 7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으로 12·12 쿠데타 주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피의자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국민의 저항이 거세졌고,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자유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 지시했다. 국회는 1995년 12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켜 12·12 관련자들을 소급입법 `5·18특별법`을 적용해 처벌하기에 이르렀다. 대법원은 12·12와 5·18 재판에서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라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1997년 4월 전두환은 무기징역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을 확정판결했으나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각각 석방됐다. 정상천 파리1대학 국제관계사 박사는 "신군부 세력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자신들의 쿠데타가 10·26 이후 어수선한 국내 상황과 북한의 재남침 위기, 경제 체제와 사회질서 붕괴 등을 타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항변하고 있다. 12·12의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과 전두환의 하나회 장교들 간의 갈등으로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1980년 5·17 전국 비상계엄령 선포와 광주 민중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12·12의 주역인 전두환·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것은 전형적인 군사 쿠데타의 결과"라고 단언했다. 정 박사는 "이들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훈인 `爲國獻身 軍人本分(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을 망각한 것이다. 충성을 다해 나라를 지키라고 했지, 헌법을 유린해서 정권을 잡으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일침을 가했다. 마오쩌둥은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전두환이 12·12 쿠데타를 통해 국가 최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아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내부 총질`로 국가의 부름을 받은 동료 군인들이 피를 흘리며 죽아 갔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 교과서에서 나온다.` 이 나라 국민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려 했던 장태완 장군의 호연지기가 `서울의 봄`을 넘어 `칠곡의 봄`으로 한껏 펼쳐지기를···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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