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것을 계기로 팔공산에 속하며 칠곡 지명의 유래가 된 가산(架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환경부는 지난 5월 23일 제138차 국립공원위원회를 열어 ‘팔공산 국립공원 지정안’을 심의·의결했다.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던 팔공산이 이번에 국립공원으로 새로 지정된 것은 2016년 태백산도립공원 이후 7년만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팔공산은 자연생태계, 자연경관, 문화자원 등을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보존가치가 매우 높다. 실제로 2021~2022년 이뤄진 팔공산국립공원 지정 타당성 조사에서 다른 국립공원과 비교해 팔공산의 야생생물 서식 현황은 8위, 자연경관 자원은 7위, 문화자원은 2위 수준이었다. 야생생물도 수달·삵·붉은박쥐 등 멸종위기 야생생물 15종을 비롯해 총 5,296종이 서식하는 등 다양했다. 총면적인 125.600여㎢인 팔공산은 경북 칠곡, 군위, 경산, 영천과 대구시 동구 등 5개 시·군·구에 걸쳐 있다. 그중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이 30.067㎢로 경북도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팔공산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가산은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가산은 7개 봉우리를 이루어 칠봉산(七峰山)이라고도 한다. 가산바위를 포함한 산 정상이 7개의 봉우리로 에워싸여 있다. 봉우리가 있으면 골짜기가 있는 법이다. 고을 이름 ‘칠곡군(漆谷郡)’에서 칠곡(漆谷)은 과거 ‘칠곡(七谷)’으로 사용했다. 7개의 봉우리(七峰)가 7개 골짜기(七谷)를 이룬 데서 ‘칠곡(七谷)’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만큼 가산은 칠곡의 지명을 낳은 어머니 같은 산이다. 이후 七(일곱칠)의 가진 자 `柒`(일곱칠)로 바뀌어 `柒谷`(칠곡)으로 사용하다가 일곱칠 자가 `漆(옻칠)` 자로 변경돼 현재까지 漆谷郡으로 쓰고 있다. 칠곡향토사학회가 발행하는 `칠곡향지`는 11집까지 표지 제목에 `漆谷鄕誌`가 아닌 `柒谷鄕誌`로 적고 있다. 칠곡군은 물론 대구 칠곡에도 옻나무가 군락을 이룰 정도로 옻나무가 많아 지명이 `漆谷`이 되었다는 역사적 기록과 사실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대구 칠곡에서는 `漆谷`의 뜻풀이로 `옻골`이란 명칭을 사용한 행사명과 식당 상호 등에 이용할 뿐이다. 칠곡군의 경우 동명면 송산3리에 위치한 `옻밭(골)`이란 자연부락이 있다. 마을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밭(漆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역시도 `漆谷`이란 지명에 영향을 주거나 지명 기원이 되지 못한다. 옻나무와 관련되는 옻골의 한자어인 `漆谷`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따라서 `七谷`을 사용해 이 지명의 기원이 되는 가산과 가산산성의 아름다움은 물론 호국평화 정신을 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칠곡군의 시그니처 포즈 `럭키 칠곡`이 칠곡지역 각종 행사장은 물론 SNS 등으로 확산돼 가고 있는 상황에 이 부분에 대한 규명은 확실히 해야할 것이다. `럭키 칠곡`에서 칠자의 기원과 의미도 모르고 포즈를 취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럭키 칠곡`의 포즈는 `럭키 세븐`의 의미일 뿐 아니라 왼손의 손가락 모양도 `7`자를 표시하고 있다. 요컨대 칠곡의 한자어는 `漆谷`이 아니라 `七谷`으로 변경해 사용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다. 팔공산 가산의 국립공원화를 계기로 이러한 칠곡의 의미를 살리고 칠곡(七谷) 지명의 기원과 역사적 뿌리, 나아가 칠곡의 정체성(identity)을 살려 `럭키 칠곡`의 브랜드 가치와 칠곡군민의 자긍심을 더욱 높일 수 있기를 바란다. 현인이 1948년 불러 히트한 `럭키 서울` 곡명은 당시 담배 이름 `럭키 스트라이크`(Lucky Strike)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 노래는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을 세계에 알리겠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노래다. `럭키 서울`은 40년 뒤인 19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선수단 입장곡으로 울려 퍼져 정말로 세계 속에 서울이 있음을 널리 알렸다. `럭키 칠곡`의 역사적 가치는 담배 이름을 인용한 `럭키 서울`에 비교할 수 없으리라. `럭키 칠곡`은 우리나라를 지켜온 가산(가산산성)에서 유래된 사료를 근거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가산 정상(높이 901.6m)에 위치한 가산바위는 상면이 약 270㎡ 규모로 절삭기로 깎아 놓은 듯한 완전 평면이다. 가산바위는 가산산성의 성벽 사이로 높이 약 10m로 솟아 있는 바위다. 사방이 툭 틔어 주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가산바위 양쪽으로는 가산산성 내성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군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축조됐다. 얼마나 완벽한 방어를 하려고 했기에 외성, 중성벽, 내성 세 겹으로 쌓았을까?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에는 1200여개의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산산성은 외성·중성벽·내성 삼중곽 형태의 극히 드문 산성으로 그 중요성을 말해 준다. 가산산성 출구로 외성 남쪽 홍예문(虹霓門) 형식의 진남문(鎭南門)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고 ‘嶺南第一關防’(영남제일관방·방어하는 영남 제일의 요새)이란 현판이 보인다. 경산,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가산산성에 속했다. 1640년 가산산성을 축조하고, 팔거현이 승격한 칠곡도호부 관아(관청)를 가산산성 내에 두었다. 이는 부산~대구~문경새재~충주~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낙동강을 통한 왜구들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이다. 1819년(순조 19년) 주민들이 높은 가산을 오르내리면서 조세 납부 등 볼일을 봐야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팔거현(현재 대구 북구 읍내동)으로 관아를 옮겼다.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의 장계(狀啓)에 의해 이뤄졌다. 그후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칠곡군청이 왜관으로 이전했고, 칠곡군은 칠곡군청 소재지를 왜관으로 옮긴 지 100주년이 되는 2014년 3월 1일 ‘칠곡군 왜관개청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바 있다. 당시 지역 기관단체와 군민들의 600여종 수장품을 담은 타임캡슐을 칠곡군교육문화회관 소공연장 앞 마당에 매설했다. 칠곡군의 역사와 발자취를 100년 뒤 후손에게 물려줄 의도였다. 100년 후 `럭키 칠곡`과 `럭키 서울`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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