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이 법 앞에 평등한 국가만이 안정된 국가다." 24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다.
외국의 대다수 정의의 여신인 디케(Dike) 동상은 두 눈을 가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법원 로비의 동상은 선녀가 한복을 입은 듯한 모습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실체적 진실을 가리겠다는 의미라고 하지만 눈을 가리지 않아 권력의 눈치를 잘 살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식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국·추미애·LH사태` 등 끊임없이 터지는 불공정 터널의 끝은 어디인가?
국민은 공정과 정의가 무너진 현실 앞에 분노하고 있다. 불환빈환불균 (不患貧患不均)이다. 가난(어려움)은 참을 수 있어도 불공정은 참지 못한다는 의미다. 극심한 양극화로 국가공동체가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코로나19로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공직자들의 투기는 끓는 가마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여기에 무슨 여야와 좌우 이념, 진영의 논리가 필요하단 말인가. 오로지 국민은 `양심과 상식`, `정의로운 법질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진실과 사실`을 염원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녀·계층·지역 등 갈라치기`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재난지원금과 포퓰리즘으로 평등을 앞세웠는데도 불구하고 더불어민주당은 4·7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중국 송(宋)나라 유학자 육상산은 일찌기 `(백성은) 가난함을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고르지 않음을 근심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이외수의 소설 `보복대행전문주식회사`에서도 인용됐다.
원래 이 말은 논어 계씨편의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불환과이환불균, 불환빈이환불안)`에서 유래했다. `정치를 함에 있어 위정자는 백성이 부족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평등한 것을 걱정하며 백성이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불안해 하는 것을 걱정하라`는 의미다.
▶사법부의 수장이 무너졌는데 법과 양심은?
대한민국 헌법 101조1항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 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돼있다.
그러나 현 정부와 사법부는 어떠한가? 법관은 오직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는가? 굳이 여기서 답을 내놓지 않아도 국민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사법부 수장 김명수 대법원장부터 헌법상 삼권분립과 법원 독립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시국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김 대법원장은 지난해 5월 건강상 이유로 사표를 제출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와 나눈 육성 녹음에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사표를 수리하면 국회에서 탄핵 얘기를 못하니 내가 비난을 받을 수 있어 수리 못하겠다"고 발언한 내용이 공개된 바 있다.
헌법학자 허영 경희대 석좌교수는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수장으로 외풍으로부터 삼권분립과 사법의 독립을 위해 나서야 할 사람"이라며 "대법원장의 자질이 전혀 없다는 걸 스스로의 말로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지난 2월 이와 관련, "만약 김 대법원장이 여당의 탄핵 추진을 염두에 두고 임 법관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후배의 목을 권력에 뇌물로 바친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 대표는 “사법부 스스로가 권력의 노예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며 “검찰 통제에 실패하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는 권력의 시녀를 만든 이 정권은 지속적으로 법원을 압박하고 이제는 대법원장까지 나서서 우리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보다도 못한 권력의 무수리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선거법 재판은 법상 6개월 이내에 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난해 4월 15일 있었던 총선에 대한 선거 무효 재판이 아직까지 재판이 제대로 진행이 안되고 있다. 대법원이 스스로 하급심 법원에는 기간을 지키지 않는다고 경고도 하면서 본인들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재판을 지연하고 있어서 고발당한 상황"이라고 했다.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손에는 칼 대신 법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중앙홀 전면에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대법원은 홈페이지를 통해 "박충흠의 작품으로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서구적인 이미지의 정의의 여신을 한국적인 느낌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다. 얼굴의 모습은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고운 자태가 엿보이도록 하였고, 의상도 우리 고유의 전통 복장으로 처리하였다. 한 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다음과 같은 비판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서구의 정의의 여신은 통상 입상으로 두 눈을 안대로 가린채 한 손엔 천평 저울을,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있다. 눈을 가린 것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공정한 재판을 의미한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재판하겠다는 것이다. 칼을 든 것은 정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천평 저울이 기우는 것은 불의를 뜻한다. 여신은 그 순간 칼을 휘둘러 정의를 실현한다. 곧, 서구의 정의의 여신상은 공평한 재판과 정의의 실현을 상징화한 것이다.
대법원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뜨고 있다. 눈을 떴으니 완벽한 공평을 기대할 수 없다.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앉아 있는데, 법률만 읊조리는 책상물림 법관의 모습이다. 법전(법)이 정의를 자동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내 눈엔 정의보다는 법(법관) 만능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현재의 사법농단 사태는 정의의 철학이 부족한 대법원이 만들어낸 범죄다. 불의를 보면 칼을 내리치는 정의의 여신을 불의를 용서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바꾼 (정의)철학의 빈곤과 관련이 있다. 사법농단 정리되면 정의의 여신상을 바꾸길 바란다.
반론도 제기됐다. 한 네티즌은 "정의의 여신상은 눈을 뜨고 돈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모습까지 반영해 정의롭게 심판할 것 같다. 칼은 강력하고 확실하지만 동시에 차갑고 극단적이다. 법전은 부드럽고 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는 조금 잘못됐다고 가차 없이 찔러 죽이는 사람이 아닌 법전을 보며 상황에 맞춰 판결하는 사람이다. 박충흠 작가의 정의는 눈을 똑바로 뜨고 올바름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대부분 나라의 법원 앞에는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양손에 천칭 저울과 칼을 든 여신상이 서 있다.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지방재판소 베크 판사는 법정에서 철저하게 두 눈을 천으로 가렸다. 모든 서류를 법원 서기가 대신 읽어주었다. 베크 판사는 오로지 귀로 듣고 재판을 진행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판관이라도 소송 당사자의 얼굴을 보거나 주위의 말 없는 압력을 느끼게 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그 사람을 보고 어떤 선입견을 품게 된다면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겠습니까?" 베크는 신화 속 여신들이 상징하는 `법의 정신`을 현실에서 그대로 실행한 판사였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