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계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
초대 민선 석적면장으로 추대되기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독립유공자) 송재(松齋) 이달영(李達榮) 선생의 추모비 제막식이 지난 11월21일 왜관읍 석전리 애국동산에서 열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이달영 선생의 후예인 이수현씨 형제와 4명의 딸을 비롯한 일가친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다음은 이현시 추모비건립추진위원장이 이날 인사말을 통해 밝힌 조국을 위해 몸바친 이달영 선생의 일대기를 요약한 내용이다.
애국지사 송재 선생은 1911년 왜관읍 매원리에서 출생, 어릴 때부터 기품과 지절이 남달랐다고 한다. 일제 치하의 일본인들의 차별과 박해, 멸시를 통감한 가운데 왜관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뜻을 세워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교)에 입학해 수학하게 됐다. 당시는 6·1운동이 일어 난 뒤라 일제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삼천리 강토가 국권 회복을 위한 의분과 열기가 화염처럼 불타고 있을 때였다.
송재 선생은 1929년 광주 학생운동이 봉기하였을 때 분연히 궐기, 배일운동에 솔선해서 참여하게 되었으며, 1931년 우리 민족의 역사와 고유문화를 말살하는 황국신민화 교육에 항의하고 일인교사 배척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일제 경찰에 연행, 심한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비분(悲憤)을 참지 못해 당시 대구고보의 동창인 이두석, 정행돈, 박형동 등과 함께 70여인의 동지를 규합해 성진회, 형평사 등 비밀조직을 결성하는데 선봉적 역학을 수행했다. 동시에 민족계몽과 독립정신을 함양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통감하고 구국운동과 계몽운동을 병행해 활동하다가 1938년 2월 모든 진상이 일제에 발각돼 여러 동지들과 함께 왜관경찰서에 체포됐다. 그리고 대구경찰서에 이송되는 등 왜경(倭警)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김천형무소에서 1년9개월의 옥고를 치루는 고초도 겪었다.
애국지사 송재 선생은 그 후에도 구국의 일념으로 만주로 건너가 동지들과 함께 수년간 항일 독립운동을 했고, 향리에서 위장 사업체인 인쇄업을 경영하면서 왜경의 감시를 피해 배일교재 인쇄물을 배포하는 등 애국운동을 계속하다가 조국광복의 기쁨을 맞이하게 됐다.
그는 광복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을 심히 슬퍼했으며, 만인이 추앙하는 애국자로서 초대 민선 석적면장으로 추대되어 일제 치하 탄압과 수탈로 곤경에 허덕이는 농촌 부흥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1950년 9월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향년 40세로 운명했다.
정부는 올해 3·1운동 9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에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장기초 선생을 비롯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119명을 포상했다. 이 때 송재 선생도 독립유공자로서 대통령 건국포장이 서훈 됐기에 선생의 위대한 공적과 조국수호의 애국정신을 대대손손 후세에 전승하는 추모비를 건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