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학자, 애민의 정치가 석담 이윤우(李潤雨) 선생(1569∼1634)은 자는 무백(茂伯)이고, 호는 석담(石潭)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본향은 지천면 신리 웃갓의 증 좌승지(左承旨) 회복의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일생동안 선생은 탁월한 학식을 바탕으로 검열관으로 활동하여 군왕(君王)을 계도하는데 노력했고 부제학 우복 정경세와 함께 대학, 논어를 교정하는 등 세당대의 학술문화를 주도하였다. 선생은 왕명으로 초유교문(招諭敎文)을 찬하는 한편, 함경도 선유어사(宣諭御使)로 파견되어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선생께서는 민폐의 해결에 누구보다 고심했던 애민(愛民)의 정치가이자 대북정권의 전횡을 좌시하지 않았던 감언지사(敢言之士)였다. 선생에 대한 유병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누군가 선생의 집에 자객을 보냈다. 하늘의 도움인지 마침 잠들지 않았던 선생은 태연히 자객을 맞았다. “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으나 후일을 위해서 사초는 바르게 직필해야 하느니라. 자네도 이 나라 백성이라면 옳은 일을 하려는 사람을 해쳐서야 되겠느냐.” 자객은 선생의 인품과 설복에 감화되어 백배사죄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선생은 관기숙정작업으로 부정부패를 발본색원한 공로로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 일등에 녹훈되어 회맹연(會盟宴)에 참여하기도 했다. 선생은 외직인 담양부사로 부임해 향품을 새롭게 진작시켰고 향교와 미암서원(眉巖書院)을 수거하여 교학활동을 독려하는 등 흥학에 열정을 쏟았다. 선생은 부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부민들은 청덕비(淸德碑)를, 사림들은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그의 선정과 흥학의 공을 기렸으며, 그들이 쌓아주고 간 돌담이 아직도 전해져 담양담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선생은 한강(寒岡)의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간행하였다. 조선 유학사는 물론 영남학맥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선생은 관직생활을 마무리한 채 낙향하여 왜관 매원에 감호정사를 짓고 이주해 이암, 여효주 등 많은 문인을 길러내고 선대의 장갈을 제찬하는 등 자가의 문헌을 정비하는데 노력하다가 66세 일기로 별세했다. 현재 석담 선생의 종택이 있는 지천면 신리 웃갓에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이복희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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