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어렵게 얻은 풍요, 제대로 누려야 낮엔 기록적인 폭염으로, 밤엔 연일 열대야로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견디기 힘들었던 지난 여름, 잠시나마 이 더위를 식힐 방법이 없나 궁리 끝에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포항으로 가는 열차여행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내에게 오늘은 쉬는 날이니 포항죽도시장에 갔다 오자고 했다. “이 더운데 어딜가요? 집에서 붓글씨나 쓰렵니다” 아내의 대답이었다. 한참을 주저하다가 다시 기운을 내서 붓글씨는 언제든지 쓸 수 있으니 오랜만에 죽도시장에 가서 싱싱한 회도 먹고 시원한 바닷바람도 쐬러 가자고 했더니 그제서야 동의를 하는 아내였다. 여행경비를 절약하는 데는 경로우대열차만한 것이 없다. 아내의 동의를 얻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다. 10시 10분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경로우대열차는 72명까지 선착순으로 탑승할 수 있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내 계산으로 대구역에서 동대구역까지는 나와 아내는 경로우대로 전철은 공짜이고 동대구역에서 포항까지는 경로우대 열차비가 1인당 3300원이므로 왕복요금은 아내와 나를 합쳐 1만3200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시간이 늦어 동대구역에서 출발하는 경로열차를 놓칠 것 같아 택시를 타지 않을 수 없어 “딴 데 아끼면 되지 뭐!”라며 택시비 3600원을 내고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얼마나 빨리 왔는지 4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그것 참 아뿔사! 3600원…. 포항에 도착하니 12시 10분. 배도 고프고 피로하지만 다시 죽도시장으로 그 더운 날씨에, 그것도 정오시간에 걷기 시작했다. 아내보기가 조금 미안하지만 택시를 타지 않고 걸었다. 가던 도중 문득 생각난 것은 이전에 단골로 다니던 허름한 식당이었다. 그 집은 시멘트 바닥에다가 나무토막 같은 도마에 회를 장만하던 시장입구에 있는 할머니집이다. 이 집은 새벽에 바닷가에서 경매를 받은 횟감을 받아와 죽기직전의 생선을 회로 장만해서 파는 활어가 아닌 선어횟집이다. 회를 아는 사람은 선어도 좋은 횟감이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마침 이 집을 잘 아는 단골들이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원어치를 주문하니 할머니는 재바른 솜씨로 얼른 장만하고는 쟁반에 가득 담아주었다. 다른 식당의 절반가격인 것은 물론이고 인정이 넘치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나서 좋은 집이다. 나는 이런 정감이 있는 곳이 좋아서 이런 곳을 즐기는 편이다. 여러 사람과 함께 갈 때는 이집에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닷가에 가서 싱싱하지 않은 죽은 것을 회로 먹고 온다는 뒷말 때문에 그렇다. 허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수족관에 오래 가두어 둔 횟감들은 진기가 빠져 껍데기만 먹는 것과 진배없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 뒷말이 나오는 것이다. 회를 깨끗이 장만하여 물기를 말끔히 빼고 앞집 2층 초장집에 가니까 초장과 쌈채소, 마늘, 고추 등 일인당 2000원에, 공기밥 하나 1000원, 콜라 2병 2000원이고, 술은 이과도주(중국술)를 집에서 반병 남은 것을 가져가서 콜라에 섞어 마셨으니, 회포함해서 도합 1만7000원으로 이 세상이 내 눈 아래에 있다는 행복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아내는 “술을 가져가면 초장집 주인은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게다가 체면 구기면서 술을 마시면 술맛도 떨어지니까 앞으로는 절대로 술집에 술을 가지고 가는 일은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돈 2000원을 아끼기 위해서 굳이 눈치를 보면서까지 먹어서야 되겠나 하는 후회를 했다. 미리 4시 10분 경로우대열차표를 사두었기 때문에 아직도 시간이 2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폭염을 뚫고 포항역으로 걸어서 갔다. 에어콘으로 시원한 대합실은 이미 빈자리가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노인네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릴 법 한데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노인네들이 힘도 없고, 말수도 적은 것은 아마 폭염의 영향 때문인 듯 했다. 열차출발시간까지는 제법 남아있었기에 우린 커피 한잔하기로 했다. ‘딴 데 아끼지 뭐’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에 비싸봐야 얼마나 비쌀까하는 생각으로 커피숍에 들어갔다. 냉방장치도 잘되어 있고 꽤 고급스러운 분위기인 것이 잠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기에는 최고인 듯했다. 안락하게 보이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기대고 있는데 음악이 유행가가 아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소에 즐겨듣던 안드레아 보첼리의 ‘아베마리아’가 흘러나오지 않는가! 음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마치 내가 꼭 무엇엔가 홀린듯한 환상 속으로 빠져드는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환상을 깬 것은 메뉴판이었다. 대부분의 가격이 4500원 이상이었다. 한 쪽 구석에 4000원 하는 것이 한 둘은 있었지만 너무 비싼 찻값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그대로 나갈 수도 없어 냉커피 2잔을 품위 있게 주문하니 도합 8000원으로, 2000원 빠진 1만원이었다. 속은 쓰려도 할 말이 없어 헛기침 한 번 하고 주문받으러 온 사람 앞에서 음악 좋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커피 값이 대구에서 포항 가는 차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은가! 대구행 열차를 타고 오후 6시경 동대구역에 무사히 도착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더니 내 나이와 비슷한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는데, 영천에서 승차한 같은 열차여행객이었다. 그 노인 앞에 있던 할머니 두 분의 이야기를 들은즉, 참외를 큰 박스로 하나를 짊어지고 지하철역까지 왔는데 할머니들이 할아버지에게 이 무거운 짐을 누구 줄려고 가져가느냐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아들 삼형제가 대구에 사는데 자신이 직접 농사지은 참외를 갖다 먹으라고 몇 번 이야기해도 가져가지 않아서 삼등분해서 골고루 나누어 주려고 가지고 간다고 했다. 이 때, 할머니 한 분이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 젊은 부부가 사는데, 하루는 시어머니가 시골에서 좋은 재료로 정성껏 담은 고추장을 경비실에 맡겨두고 며느리에게 전해달라고 하고는 갔다. 그러나 경비아저씨가 젊은 부부에게 고추장을 가져가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해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다가, 사정하다시피 하는 경비아저씨의 부탁을 듣고서 겨우 가져갔다고 한다. 그 후 열흘정도가 지났을 무렵, 이 젊은 부부가 고추장단지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그 고추장 단지 뚜껑을 열어보니 흰 곰팡이가 피어있었다고 한다. 그 할머니는 그것을 집으로 가져가서 윗부분을 살짝 걷어내고 아주 맛있게 먹고 단지는 하도 예뻐서 장식장으로 잘 모셔 놨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우리 아이들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면서 고추장단지를 버린 젊은 부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어쩌면 내 자식 만은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는 것이 행복인지도 모른다. 이런 걱정 저런 걱정 별 걱정을 다하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노인네인가 보다. 요즈음의 세상 돌아가는 정서를 보면 절약할 줄 모르고 돈 귀한 줄 모른 채 낭비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다. 쓸데없이 낭비할 지라도, 그저 나만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면 그만이란 생각이 팽배한 요즘 세상이다. 온갖 고생 끝에 쉽지 않게 얻은 풍요를 누리기도 전에, 그것들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돈을 소중히 여기고 절약하는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지난 세월, 우리가 힘들게 고생한 시절을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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