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에 있어서 신탁통치문제는 한반도의 분단원인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이에 관한 착오나 오류는 한국현대사 전반에 걸쳐 역사의 왜곡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도 신탁통치에 관한 오류는 반드시 시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한국신탁통치는 8·15해방 이전인 1945년 6월 26일, 유엔헌장에 의하여 조약화 됨으로써 가시적으로 확정됐던 것이다.(유엔헌장 제77조 1항B). 그러기에 해방된 한국민이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역사적 과제도 `건국준비`가 아니라, 그것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간에 이 필연의 운명으로 다가오고 있는 신탁통치문제에 대한 대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헌장상의 한국 신탁통치 관련조항을 이해하지 못한 해방정국의 지도자들은, 조국의 운명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해방’이 곧 ‘독립’인줄 오인한 나머지 한민족의 운명을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과 그 결과로서 조직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9월 6일)이다.
이러한 인민공화국의 선포는, 필연적으로 민족진영에 의한 타도투쟁에 직면하게 됨으로써 이때부터 남한에서는 민족내부의 이념적 유혈투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민족진영에서는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환국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의‘시정조건’이 발표될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민족분단이 예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월초 인민공화국 선포로부터 발단된 좌우 유혈투쟁은 서로가 상용할 수 없는 민족분열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신탁통치를 둘러싼 찬반투쟁도 결국은 ‘8·15’이후 전개되어 왔던 좌우 이념투쟁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자결주의 운동으로 시작된 반탁운동도 끝내는 반탁-반공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분열이 미소공동위원회를 결렬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던 것이며 미소 양군이 분할점령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통일한국의 재건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다는 것은 바로 3·8선의 고착화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분단의 책임도 신탁통치를 둘러 싼 한국민의 찬반투쟁에 그 절대적인 책임이 돌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8선이 그어지기 전에 이미 유엔헌장에 의하여 한국신탁통치가 조약으로 명문화돼 있었다는 사실은 3·8선이 적어도 한반도의 분단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유엔헌장상의 신탁통치제도는 국제연맹규약에서 제도화 했던 위임통치를 모방한 것으로서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초기부터 루즈벨트 미대통령에 의하여 제안된 제도였다. 이러한 루즈벨트의 구상이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연합국 정상(미·영·소) 간에 최종적인 합의를 이루었던 것이며 이 얄타합의를 조약으로서 성문화한 것이 바로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 연합국전체회의(유엔창설회의)에서 조인된 유엔헌장 제77조의 규정이다.
유엔헌장(제77조 1항)에서는, 전후 신탁통치를 실시할 지역으로서 ⓐ현재 위임통치하에 있는 지역과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적국으로부터 분리되는 지역 및 ⓒ시정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는 국가(식민종주국)가 자발적으로 신탁통치하에 두는 지역 등을 열거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면 한반도는 유엔헌장 제77조 1항B의 규정에 의하여 신탁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다. 다만 어느 지역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통치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헌장에서 일률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므로 유엔헌장은 장차 체결될 ‘관련국가’간의 ‘개별협정’에서 그 시정조건을 정하도록 했던 것이다.(유엔헌장 제77조 2항)
이러한 유엔헌장의 신탁규정에 따라 미·영·소 3국 외상은,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의 ①‘시정국’을 미·소·중·영 등 4국으로 한다는 것과 ②‘시정기간’은 5년 이내로 한다는 ‘시정조건’에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스크바협정은 유엔헌장의 신탁규정을 시행하기 위하여 그 조건과 절차를 규정한 ‘시정조약’에 불과하며, 모스크바협정에 의하여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헌장상의 한국신탁통치 관련조항을 이해하지 못한 해방정국의 지도자들은, 12월 28일 모스크바의 소식(시정조건)이 국내에 알려지자 그야말로 ‘청천병력’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신탁통치는 8·15해방 이전인 1945년 6월 26일 유엔헌장에서 명문화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그 ‘시정조건’이 발표될 때까지도 당시의 정치지도자들이 신탁통치에 관한 이 필연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시작됐던 것이다. 그로 인한 착오가 민족분단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60년이 더 흘러간 오늘날 까지도 그것이 오인이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함으로써 국민교육마저 오도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국정교과서인 것이다. 교과서에는 아직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됐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자라나는 새 세대들은 오늘도 그것을 염불처럼 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협정에는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규정이 없다. 그러한 조항이 있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모스크바협정은 유엔헌장의 신탁규정을 시행하기 위하여 그 조건과 절차를 규정한 ‘시정조약’에 불과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국 원수에게 그러한 권한은 없다.
그러기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터무니없이 쓰여진 교과서는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해방정국에 있어서 신탁통치문제는 한반도의 분단원인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므로 이에 관한 착오나 오류는 한국현대사 전반에 걸쳐 역사의 왜곡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유엔헌장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대명천지에서 이 분야의 전문학자들 조차도 예외 없이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고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전문학자들은 “미국은 유엔기구하의 신탁통치를 제안했지만, 회의진행과정에서 미국이 양보하여 소련 측 제안을 수락함으로써 ‘유엔기구하의 신탁통치’라는 미국측 안의 내용은 취소되고 소련 측 초안을 기본으로 하는 ‘모스크바협정 방식’의 신탁통치가 3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측 초안을 기초로 작성된 이 모스크바협정에서 규정한 최장 5년간의 4국(미·소·중·영) 신탁통치가 바로 유엔기구 하에서 시행되는 유엔헌장에 의한 신탁통치란 사실을 이들 전문학자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현대사는 앞으로도 계속 왜곡 기술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탁통치는 유엔헌장에서 제도화된 것이므로 모든 신탁통치는 그 모두가 유엔헌장에 의한 신탁통치이며, 유엔헌장의 시정원칙에 의하지 않는 신탁통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헌장에 의한 신탁통치 외에 그와는 또 다른 방식의 신탁통치, 즉 ‘모스크바협정방식’의 신탁통치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는 것은 신탁통치제도에 관한 근본적인 몰이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국신탁통치는, 다른 모든 신탁통치 실시지역(14개 지역)과 마찬가지로 8·15 해방 이전인 1945년 6월 26일 유엔헌장에 의하여 조약화 되었으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정국의 지도자들이 유엔헌장상의 한국신탁통치 관련조항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조국의 운명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해방정국을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한데서부터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설정해 둔 3·8선을, 머지않아 없어질 그 점령한계선을, 바로 우리의 손으로, 우리가 우리의 분단선으로 만들었다는 이 통한의 비극이 지금도 여기 있기 때문이다. /유무열 극동평화연구소 연구원 uzrive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