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존경을 받으려면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 있어서 정당성이 있어야 하며, 그 재산을 행사하고 지킴에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하며, 그 재산을 처분함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유익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300년간 만석꾼의 부를 지켜오면서 수많은 이웃과 함께 나눔을 실천한 경주 최 부자는 조선시대 1600년대 초부터 경주 지방에서 가문을 일으킨 정무공 최진립에서 부터 광복 직후 모든 재산을 바쳐 대학을 설립한 최준에 이르는 12대간의 사람을 말한다. 경주 최 부자를 들먹이고 존경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토록 부를 지켰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독특한 가훈 속에 의(義)를 지키려는 정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따뜻한 정(情)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정무공 최진립이 자손에게 남긴 독특한 가훈 중에 그 첫째가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마라’는 가훈이었다. 최 부자들은 정치와 멀찌감치 거리를 둠으로써 정쟁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의미로 해석하면 정치적 중립과 정경분리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마라’는 또 다른 가훈에 따라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재물을 축적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흉년이 들면 땅을 내놓는 소농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양식을 꾸어주었다. 남의 약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적대적 인수합병(M&A)가 횡횡하고 있는 오늘의 사례를 볼 때 이는 재산 축적의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참으로 본받을 윤리경영의 한 측면이라 하겠다. ‘재산은 만석 이상 지니지 마라’는 가훈에 따라 1년의 소작료를 만석 이상 받지 않았다. 항간의 이야기로 경주 최 부자는 2만석 맞잡이란 말이 있다. 경주 최 부자가 소작료를 거두면 2만석은 족히 거둘 수 있는데 실제로는 1만석 밖에 안 걷는다는 말이다. 가진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도 있지만 최 부자의 소작인들은 소작료를 적게 내므로 누구나 최 부자가 더 많은 땅을 사서 더 큰 부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최 부자는 과객을 후히 대접하고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여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여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의 과객 대접은 소문이 났었다. 만석 소득 중에서 10분의1인 천석 가까이를 접빈에 썼다고 하니 이 집의 손님 수를 짐작할 수 있다. 하루에 수십 명의 손님이 사랑채에 유숙하며 마음대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담론을 하였으니 최씨는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넓히고 정보를 얻으며 고급 교제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훈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사방 1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이다. 흉년 구제는 나라에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때 최 부자는 과감히 곳간을 열고 굶주린 이웃을 구했던 것이다. 최 부자는 사방 백리에 걸친 주민을 생활공동체인 이웃으로 생각하였고, 어려울 때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경주 최 부자는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최준(1884∼1970)에 이르러 마감한다. 나라가 망하는 불우한 시대를 살았던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은 부산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면서 많은 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냈으며, 그 결과 회사는 어려워지고 부채를 사장인 자신이 몽땅 떠안는다. 일제는 여러 벼슬을 제시하며 갖은 방법으로 유혹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고, 해방이후 그는 나라가 망한 것이 부족한 교육 때문임을 깊이 깨닫고 300년 묵은 그의 재산을 아낌없이 던져 영남대학교 전신인 대구대학을 설립하였다. 경주 최 부자의 이러한 훌륭한 선행의 뿌리는 독특한 가훈에서 볼 수 있는 의(義)와 중용(中庸)의 철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철학이라도 후손들이 지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하고 싶은 벼슬을 참고,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묵묵히 조상의 뜻을 지키며 실천한 후손들의 노력 또한 잊어서는 안될 덕목이다. /우태주 리포터 woopo2001@hanmail.net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