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朴矩)라는 선비가 약 300여 년 전에 지금의 행정(杏亭)리에 살았다. 그는 자기 집 담장 아래에다 살구나무 두 그루를 심고 정성껏 가꾸었다. 이후 그 나무는 크게 자라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이 마을을 가리켜, 살구나무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행정(杏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살구나무는 봄에 꽃이 일찍 피어서 좋다. 또 잎이 우거지면 무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황금색의 열매를 먹고 나면 그 속에 속 씨앗이 남는데, 이 속 씨앗 또한 아주 긴요한 약제로 쓰인다. 그러니 살구나무는 꽃, 잎, 과육, 속 씨앗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참으로 귀중한 나무라 아니 할 수 없다. 일찍부터 이 살구나무의 효능을 잘 알고 선용(善用)한 사람이 있었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중국 오(吳)나라에 동봉이라는 의원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의술로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그런데 그는 병이 나은 환자에게 결코 돈을 받지 않고 그 대신 그의 집 뒤에 있는 조그만 동산에 살구나무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중병을 앓던 사람은 5그루를 심게 하고, 가벼운 환자는 1그루를 심게 하였는데, 그렇게 세월이 흐르자 그의 집 뒤 동산은 자연스럽게 살구나무 숲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살구 씨로 건강을 지키고 동봉은 많은 살구를 수확하여 그것을 곡식으로 바꾸어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행림(杏林)은 의원이나 의학계를 일컫는 말이 되었으며,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원을 대신하는 말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의술을 인술(仁術)이라고 부르게 된 깊은 뜻이 이 살구에 담겨 있다 하겠다. 우리나라에도 살구나무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아주 많이 있었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예로부터 살구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날 시골길을 가다 보면 집집이 한두 그루 정도의 살구나무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는 말이 있듯이 이 살구꽃 핀 마을이 우리네 옛 시골 마을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살구를 떠올리면 아직도 입안에 침이 절로 고인다. 그 시금털털한 살구, 그것을 따먹던 어린 시절 추억 때문이다. 너네 없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그때 그 시절, 낮이 길어지고 배가 고픈 초여름에 이 살구나무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잔뜩 달아 주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먹거리가 풍부해서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조차 외면하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식용, 약용으로써 그 쓰임새가 아주 훌륭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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