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적읍 도개(道開)는 원래 유학산(遊鶴山)과 소학산(巢鶴山)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 마을이다. 이 마을을 벗어나 유학산이나 소학산 정상에 올라보거나 아니면 외지에 나갔다가 다시 이 마을로 들어서보면, 금방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도개는 다른 마을과 차단된 깊은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 외부세계로 통할 수 있는‘길’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도개는 왜관과 왕래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길이 생기게 되면서부터 마을 이름을 도개(道開-길이 열렸다는 의미)라 불렀다고 한다.
지난날 우리의 옛길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었을까? 개항 기를 전후하여 한국을 방문했던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이 세계에서 도로 사정이 가장 나쁜 나라이며, 그와 같은 문제점이 후진성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자동차, 기차 등 근대 교통기관이 발달한 서구사회의 외국인들에게는 보행 위주의 우리나라 도로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양의 길에 대한 인식은 속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서양에서 쓰는 ‘길’과 관련된 용어를 보면, 영어의 비클(vehicle)은‘이동’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고, 로드(road)는 ‘말 타고 가다’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의 이런 길 개념은 물질을 획득하기 위하여 남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경쟁심리가 숨어 있다. 지금의 고속도로가 아마도 이러한 욕구와 속도가 가장 잘 반영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길은 서양의 길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우리의‘길’은 유교사상과 도교사상의 영향으로 비교적 소박하고 실용적으로 설계되었다. 길을 뜻하는 도(道)자의 구성을 살펴보면, 도(道)자는 쉬엄쉬엄 갈 착(?)과 머리 수(首)자의 결합으로‘천천히 생각하면서 걸어간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길 개념은 효율성을 넘어서는 인생의 여유로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옛길에는 각종 돌무더기, 성황당, 미륵불, 장승, 정자나무 등 우리의 전통문화 경관들이 함께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길을 오가는 사람들의 정다운 이야기가 있다. 여기에서 많은 의견과 정보가 교환되고 우리의 전설과 야화가 만들어 졌다. 그래서 우리의 ‘길’은 `우리의 생활사를 종횡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통로`라 부르기도 한다.
길과 관계된 우리의 옛 속담에 “바쁘면 돌아가라”, “질러가는 길이 먼 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서두르지 않고 느긋한 태도를 가졌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들은 매사를 너무 서두르는 습관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러한 버릇을 꼬집어 ‘빨리빨리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우리의 이러한 생활 습관은 아마도 20세기 이후 변질되기 시작한 우리의 길 문화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