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미술의 거장 이쾌대(1913~?) 화백의 예술 세계를 현대적인 미디어아트로 재조명한 특별전시회가 칠곡군에서 열리고 있다.
<이쾌대 미디어아트展, 빛으로 다시 태어나다>는 지난 11월 25일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매주 월요일 휴관) 칠곡공예테마공원 예태미술관과 야외마당에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이번 전시는 전통적인 회화 작품을 넘어 컴퓨터,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기술 매체를 활용한 미디어아트의 형태로 이쾌대의 작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한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관람객에게 몰입형 경험과 함께 새로운 미적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전시회는 이쾌대의 삶과 예술을 다각도로 조명하는 세 개의 전시실로 구성됐다.제1전시실(미디어아트)은 `한국의 미켈란젤로, 이쾌대`, `빛으로 남은 우리의 순간`이라는 주제로 이쾌대의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을 미디어아트로 구현했다.제2전시실(전시+체험형 콘텐츠)은 `이쾌대, 한국 근대의 장르`, `AI Contents`를 통해 이쾌대의 작품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AI 기술을 활용한 체험형 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제3전시실(체험라운지)은 `AI Contents`를 통해 관람객이 직접 이쾌대 화풍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작품 속 주인공으로 변신해 보는 등 능동적인 참여가 가능하다.
특히 이번 축제는 예술과 기술,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며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돼 눈길을 끈다. AI로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작품 속 주인공으로도 변신하는 등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한다.
인간 군상(群像)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이쾌대의 대작 <군상Ⅳ>는 1948년에 그린 작품으로 추정되며, 해방 직후 좌우 이념 갈등 등으로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역동적 인물 묘사로 담아낸 작품이다.
<군상Ⅳ>는 남녀노소 다양한 나체 인물들이 서로 뒤엉켜 물고 뜯고 때리고 싸운다. 오른쪽 구석의 사내아이는 겁에 질려 관객을 바라본다. 화면 뒤 돌로 사람을 내리쳐 살해를 기도하는 두 인물은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인과 아벨’을 연상시킨다. 화면 가운데에는 핏기 잃은 여성 시체가 한 남성의 팔에 감겨 끌려간다. 처참한 장면이다.
그림 왼쪽으로 갈수록 처절하게 무너진 군상을 뒤로한 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몇몇 인물이 배치돼 있다. 특히 한 여자아이가 사내아이와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왼쪽을 주시하는 눈망울이 인상적이다. 이 여아는 눈을 치켜뜨고 입술을 꽉 다문 채 골똘히 집중하며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이쾌대는 이 여아를 통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떠한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오로지 앞만 보고 나아가라!
이쾌대는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인물을 서로 혼란스럽게 뒤엉키듯 배치하면서도 모든 동작과 표정을 정확한 해부학적 원리에 기초해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쾌대는 일제 치하인 1913년 칠곡군 지천면에서 출생했다.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릴 정도로 해부학적 토대에 완벽한 그림을 통해 서사적이고 장엄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45년 광복 후 <군상-해방고지>(1948) 같은 대작을 발표하며 화단에 충격을 던졌다. 이쾌대는 6·25전쟁 발발 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 체제하에서 급조된 남조선미술동맹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인민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국군에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휴전을 맞았다.휴전 후 남북 포로 교환 당시 이쾌대는 자의로 북한행을 선택해 넘어갔다. 그가 북한을 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친형인 이여성(李如星)이 이미 월북(1948년경 월북한 것으로 추정)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여성은 이쾌대에게 정신적 스승이자 멘토 같은 존재였고, 이쾌대의 민족의식과 향토색 짙은 그림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월북한 이쾌대는 북한 미술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글을 발표하며 나름의 자주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북한 사회주의의 요구인 `주체미술` 노선에 동조하지 않으면서 결국 `민족허무주의`라는 명목으로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된다.이쾌대의 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1965년 위천공(위암 등)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며, 숙청된 이후 자강도 강계시에서 재혼해 살다가 1987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들 형제는 남북 모두에서 한동안 `월북 인사`라는 이유로 금기 인물로 낙인찍히는 비운을 겪었다.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