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의회는 6월 20일 로 알려진 나가사키의 하시마(端島)를 포함한 다카지마탄광유적지 (高島炭跡) 등 9건을 사적으로 지적하도록 문부과학상에게 건의했다. 이 밖에 명승 5건, 등록기념물 6건, 중요문화적경관 1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유적은 내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정부가 추천한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 큐슈· 야마구치 관련지역으로 올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실시 예정인 유네스코 자문기관에 의한 현지조사 전에 사적지정으로 국가에 의한 보호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위는 일본 아사히신문 6월 20일치 기사로 여기서 말하는 란 해저탄광지로 일제강점기 때 인구밀도가 수도 도쿄의 9배가 넘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던 곳이다. 탄광이나 금광지역이 활황기 때에는 언제나 광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돈벌이를 찾아 몰려든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 단순한 일본인들의 돈벌이 장소였다면 오늘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하고 탄을 캐다 숨져 간 곳이기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해저 700m에 있는 지옥 같은 탄광 속에서 조선인들은 12시간씩 2교대로 구부린 채 탄을 캐 날라야했다. 탄광 일이란 갱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열악한 작업 환경이라 한 달에 적게는 수명씩 많으면 몇 십 명씩 죽어나가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광부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은 가혹한 노동과 배고픔이었다.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일부는 탈출을 시도했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이라 대부분 물속에 빠져 죽거나 설사 헤엄쳐 간다고 해도 육지에 닿기 전에 잡혀 고문을 받기 일쑤였다. 는 나가사키항에서 18km 떨어진 곳으로 1887년부터 1974년 까지 석탄 채굴을 하던 곳이다. 1890년 미츠비시가 이 섬을 매입해 해저광산으로 이용했는데 미츠비시는1916년 급증하는 노동자를 수용하고 태풍으로 인한 파손을 막기 위해 일본 최초의콘크리트 구조 대형 아파트(9층 규모) 단지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콘크리트는1941년 41만 톤의 석탄을 캐낼 정도로 일본의 근대화의 초석을 이룬 곳이라고 일본인들은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선인들이 고향을 등지고 강제로 끌려와 열악한 탄광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져간 가슴 아픈 역사가 서려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수산 작가의 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강제노역의 역사도 일본은 함께 유네스코에 올려야 할 것이다./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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