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동전 던지기는 이것 아니면 저것이잖아요. 그런데 가위바위보는 내가 주먹을 냈을 때 상대방이 보자기를 내면 내가 지는 거고, 가위를 내면 내가 이기는 거예요. 서로 상대방이 무엇을 내놓느냐의 상호성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돼요. 문화론으로 보면 저쪽은 운명결정론, 즉 이거 아니면 저거. 그러니까 서부 활극 같은데 보면 결투할 때나, 축구 시합할 때 누가 먼저 공격할지를 결정할 때도 동전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가위바위보로 하죠. 한중일이 언어도 문화도 달라도 중국은 “차이 차이 차이”, 일본은 “짱 켄 폰”, 우리는 “가위 바위 보”라 하잖아요. 핵 가지고 싸우고, 항공모함으로 싸우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통하는 건 이거란 말이에요. 약자도 여자도 남자도, 어른도 애도 가위바위보 앞에서는 평등해요. 컴퓨터, 로봇도 못 이겨요. 심지어 전체 인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하나님도 못 이겨요. 상대가 무엇을 낼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 놀라운 사실은 ‘윤관’이라고 하는 도교 사상에서 시작해요. ‘뱀은 두꺼비를 잡아먹고, 두꺼비는 지네를 잡아먹고. 지네는 뱀을 이긴다’고 하는 옛날 사상이 있거든요. 그렇게 돌고 도는 거지. 금은동의 피라미드 계층이 아니지요. 지금 한국사회엔 주먹-보자기, 갑-을 밖엔 없어요. 이런 국면에 주먹이 절대 패자가 아니고, 보자기가 절대 승자가 아닌 서로 고루고루 맞물려서 돌아가는 순환적 평등성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은 선 아니면 악, 왼손 아니면 오른손, 밤과 낮 같은 이항대립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이 있는 아침이 있고, 저녁 속에 빛이 있는 저녁노을인 거예요. 서양은 플라톤 때부터 형이상학-형이하학, 관념-육체의 이분법으로 사고 시스템을 만들었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음식을 먹어도, 짬뽕도 아니고 짜장면도 아닌 짬짜면을 먹어요. 국물이 없는 스파게티가 한국에 들어오면 뚝배기 파스타가 돼요. 이렇듯 한국문화는 양극화된 것이 아니라, 끝없이 중간언어가 있어요. 즉, 주먹, 다 쥐었죠? 보자기, 다 폈죠? 주먹과 보만 있으면 이기는 놈은 맨날 이기고, 지는 놈은 맨날 지는데 중간에 반은 피고 반은 접은 가위가 있으니까 돌고 도는 순환이 생기는 거죠. 원래 애들 속에 미래가 있는 거예요. 아이들의 본능 속에 우리가 모르는 우주의 질서나 과학 이론들이 있다고 하잖아요. 아기들이 언제 나올 줄을 알아서 어머니 뱃속에서 아홉 달 후 날짜 맞춰 나오나요? 엄마 뱃속엔 달력도 없고 학원 선생도 없는데 놀라운 거죠. 그 안에 우주가 들어 있는 거예요. 우리가 다 우주의 미션이고, 천사들이에요. 36억 년 동안 진행된 생명의 신비를 1분 동안만 생각해 보세요. 100년 전에 없었고, 100년 후에도 없을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보고 말하고 걸어 다니는 게 신기하지 않아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걸 전부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우주로부터 받은 미션이 있고,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걸 우리가 모르는 거예요. 이게 내가 말한 생명자본이지···. 지금까지 유효했던 합리적 이항 대립으로는 이제는 문제가 안 풀리기 때문이에요. 지금까지 과학으로 수학으로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거죠. 슈퍼 컴퓨터가 있고, 어마어마한 연구소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리먼 브러더스 같은 회사가 하루아침에 망하느냐는 거예요. 리먼 브러더스는 100년도 넘은, 유대인이 운영하는 금융기관인데 말이죠. 있을 수 없는 일 아니에요? 현대인은 외로운 걸 못 참아요. 잠시도 혼자 있지 못하고 문자를 쏘고 댓글 달고 채팅해요. “외로움 없는 곳에서는 명작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 한 것은 피카소였어요. 정치 경제는 그렇다 쳐도 언어를 다루는 사람은 패거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지극이 개인적인 것이고 밀실에서 산출되는 가장 원시적 생산품이니까요. 문학생산을 하는데 노조가 필요합니까? 작업은 혼자서 완성하는 거잖아요. 나의 경우 이미 작품으로도 썼지만, 여섯 살 때 여름 대낮 속에서 굴렁쇠를 굴리다가 눈물을 흘린 기억이 있어요. 평생 그 때의 이유 없는 눈물을 잊을 수 없었지요. 당시 우리 집 괜찮게 살고 친구도 있고 형제들 많은데 왜 나는 대낮에 굴렁쇠 굴리다 말고 울었을까? 그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면 내가 기획했던 88올림픽 개막식 때 떠들썩하다가 갑작스레 조용해지면서 어린애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지나는 장면으로 이어져요. 어린 시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의 경험이 없었으면 못했죠. 일본이 어떻게 이걸 뺏어가겠어요? 집단은 뺏어갈 수 있어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은 못 뺏어가요. 절대로. 자꾸 미래가 어떻고, 누구 책임인지를 말하는 한 미래는 없어요. 바로 내가 주체자가 되어서 미래를, 내 운명을 바꾸는 거지 남이 운명을 바꿔줄 순 없어요. 수정구슬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어떤 사람도 미래 예측 못 해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지요. `가위바위보 문명론` 저자 이어령 인터뷰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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