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전 1950년, 6·25전쟁은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의 합의하에 치밀히 준비한 기습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가장 처참한 전쟁이었다.개전 초 국군은 전차와 야포로 무장한 북한군과 맞서 결사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유엔의 신속한 참전결의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건국한지 2년이 되기도 전에 소멸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유엔군의 참전으로 제공,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금강, 대전이 피탈되는 등 7월 한 달 만에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과 공격기세에 밀려 낙동강까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최초의 낙동강 방어선은 마산∼왜관∼낙정리(상주시)∼영덕에 이르는 약240km이었으나, 낙동강의 자연장애물의 이점, 방어선에 배치한 병력 절약을 통한 예비대 확보, 도로망을 이용한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키 위해 8월11일 마산-왜관-포항에 이르는 180km로 전선을 축소, 조정하여 방어한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1950년 7월 중순 김일성은 일제 해방일인 8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 명령을 내렸다. 이에 북한군은 8월, 9월 두차례에 걸쳐 사활을 건 총공세를 감행했다.
8월에는 왜관∼다부동∼대구 방면의 전선에 주력부대를 투입해 공격하였으나 미군의 융단
폭격, 다부동전투에서의 국군의 완강한 방어작전으로 실패하였고, 9월에는 전 전선에 동시 돌파를 시도, 한때 영산과 왜관, 다부동, 영천, 포항이 점령당하기도 하였으나 국군과 유엔군은 사력을 다하여 격퇴하였다. 특히, 왜관∼다부동∼팔공산 지역은 경부국도 및 철도 등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수도였던 대구와 근접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므로 이곳의 방어에 국가의 운명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다부동이 돌파될 위기상황에서는 미군 2개연대, 국군1개 연대까지 증원하여 북한국의 공격을 물리쳤다. 또한, 이곳에서는 최초로 한미 합동 전차전이 벌어져 그동안 전차가 없어 후퇴를 거듭하던 아군들이 설욕을 할 수 있는 통쾌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일명 `볼링앨리전투`라 부른다. 이를 기념해 제2군사령부와 경상북도는 1971년 12월 칠곡군 가산면 금화리 125에 다부동전승비(UN전승비)를 세웠다.
다부동 방면으로 돌파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적은 8월 20일 제15사단을 영천 방향으로 전환 하였으며 국군과 유엔군의 효율적 연합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고 전투의지가 극도로 저하된 제13사단에서는 고급 간부들 까지 아군에 귀순해 왔다. 국군 제1사단의 방어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병력 손실이 발생할 정도로 전투가 치열하였으며, 특히 328고지는 15번이나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시산혈하의 혈투가 계속되었다.
55일간의 다부동전투는 아군 1만여명과 적군1만7,500여 명의 많은 사상자를 내며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마침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해냈다.
국가에서는 유학산 일대를 구국의현장이라 하여 1981년 다부동전적기념관을 건립해 기념하고 있으며 연간 수십만명의 방문객이 방문해 호국안보 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1994년부터 8차례에 걸친 유해발굴 사업에서 수습된 259점의 무명용사의 유해를 합장안치한 구국용사의 묘는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하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은 칠곡군에서 관리해오다가 1997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자유총연맹 경상북도지부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칠곡군민들은 `호국의고장`을 상징하는 다부동전적기념관을 칠곡군 안보단체에서 관리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특히 칠곡군 6·25참전 노병들은 다부동전적기념관을 통해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고 싶어하며, 안보교육에도 동참하고 싶다고 표명했다. 칠곡군안보단체에서 관리를 한다면 이같은 노병과 군민의 열망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으며 지역 정서에도 부합되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길수 칠곡군재향군인회장 gilsu113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