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불후의 고전 논어 자로편에서는 화목과 불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시 하고있다. “子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즉,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 하지않고 소인은 같음에도 화목하지 못한다. 또 지난달 우리곁을 떠난 시대의 스승 신영복 교수는 현대적 시각과 형이상상적 논리로 보다 명료하게 정의하고 있다. “和는 공존의 원리로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평화의 철학인 반면 同은 지배의 논리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동화 하려는 패권의 논리다.” 우주의 다양성과 인간의 개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선진 자유 민주주의 체제는 얼핏 무질서하고 혼란한 듯 보여도 대화와 타협을 바탕으로 다수결의 원칙을 고수하여 역사발전을 주도 하여왔는 반면, 틀에 밖힌 계획과 획일성을 통치 기반으로 삼고 인간의 개성과 기본권을 말살 유린하는 저개발및 공산 독재 국가들은 지구상에서 서서히 소멸되거나 그 국민들은 서슬퍼런 국가권력의 압제와 폭정으로 목숨 마저도 담보할 수 없는 불안과 공포의 삶을 연명해 가고있는 실정이다. 역사적 인물로 전자는 미국의 링컨이나 프랑스의 드골, 우리 조선의 세종대왕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화이부동을 실천한 귀결로 국가번영과 더불어 그의 명성은 영원히 인구에 회자되고 후자의 경우 독일의 히틀러, 공산 소련의 스탈린, 그리고 이라크의 후세인 같은 희대의 독재자들은 동이불화 했으므로 국가의 불행은 물론 자신도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했다. 이처럼 화이부동은 흥하고 동이불화는 망할 수밖에 없는 지엄한 사실을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수없이 학습해왔다. 오늘날 세계3대 오케스트라중 하나인 러시아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수년전 내한 공연을 펼첬을때 많은 사람이 열광했고 특히 우리의 전통 김덕수 사물 놀이패와 어우러진 피날레는 당연 압권이었고 백미였으며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평범한 상식으로 볼때 동서양의 이질적인 각양각색의 악기가 혼재하여 저마다의 화음으로 멜로디의 부조화가 생길수도 있으나 그것은 기우였고 장엄하면서도 때로는 조용하고 감미로운 선율에 매료 되었는데 이 다양한 소리들이 조화롭게 융합하여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것 이것이 바로 화이부동 이다. 동이불화의 경우를 예로 들면, 조직 폭력배는 화목(和睦)을 구실로 합숙을 강요하며 행동강령을 만들어 고강도의 훈련과 하물며 실전 모의연습도 불사한다특히 단체 기압이나 줄빠따(?)는 물론 혈서까지 쓴다는데 같아지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실로 가상치 못해 측은 하기까지하다. 어디 그뿐이랴? 똑같은 검은 정장차림에 깍두기 머리하며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기계처럼 90도 인사하는 모습, 이런 것이 동이불화의 표본이다. 이쯤에서 소통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 소통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 막힘없이 잘통함” 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한다. 소통 없이는 결코 인화 할수 없다고…. 다시말해 소통해야 화합이 되고 화합을 기반으로 해야 만사가 형통되는 법이다. 제대로된 소통이라면 먼저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전제를 두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봄기운 스미는 아침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과연 나는 소통을 잘하고 있나? 가족 또는 동료에게 불통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는가? 말로는 소통을 외치면서 불통하고 일방 통행만을 강요하지는 않았을가? 그렇다면 현재 나는 화이부동인가, 동이불화 인가 그도 아니면 군자로 살것인가 아니면 소인으로 살아갈 것인지 부터 성찰해야겠다. /영덕군보건소 박병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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