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을 일으킨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50일내 남조선 함락, 즉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차지하겠다는 목표 아래 파죽지세로 남하해 왔다.
남한에서는 마지막 워커라인 요충인 왜관낙동강다리를 폭파, 교두보를 확보하고 삼총사고지(포남리328고지, 자고산303고지, 낙산리286고지)를 수문장으로 인천상륙을 위한 버티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주 공격방향을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재를 넘어 대구를 향해 지상전투의 왕자인 무적의 탱크와 함께 막강한 인민군 정예군단(2만5000명)이었다. 그러나 국군은 낙오병 소총수로 재편된 백선엽 사단장의 1사단(8000명)의 전투력이 고작이어서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유됐다.
북한군은 칠곡군 북삼 마진(말구리)나루터에서 도하가 쉬운 낙동강 석적 포남리 나루터를 건너 뒷산인 328고지 육박전에서 국군과 15번을 뺏고 뺏기는 치열한 전투을 벌였다.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에서 미군 3만6천여명, 유엔군 3천700여명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다 숨졌다. 이같은 희생이 오늘날 한국이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밑거름이 됐고, 한국민들은 미군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백 장군은 당시 다부동 전투 때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며 배수진을 쳐 후퇴를 막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백선엽 장군으로 화가 치민 김일성은 즉각 체포하라면서 황소 100마리를 현상금으로 걸었다. 야간에 인민군 생포조가 다부동 고개 넘어 동명초등학교에 주둔한 사단장실을 급습했으나 불사조인 백선엽 장군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한국전쟁의 영웅이요 세계전투 사에 길이 빛나는 유학산 다부동전투의 무용담은 미국 육군사관학교 전투교본에 기록돼 있으며 주한 유엔군사령관 취임사에도 존경하는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을 호칭하면서 존경의 예를 먼저 갖췄다고 한다.
휴전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다부동 주민들은 유학산 자락마다 쌓인 시체 더미를 부역으로 급하게 계곡에 묻었지만 골목마다 시신 썩는 냄새로 견딜 수가 없어 우선 주위 텃밭 나무 아래 가매장 처리했다. 그 해 과일이 시체 거름 덕분에 대풍을 이뤘다는 전설 같은 비화(悲話)는 우리 마음을 저리도록 아프게 한다.
현충일이 돌아오면 백선엽(현재 95세) 장군은 다부동 전투현장을 한 해도 빠짐없이 찾아와 처참했던 그날을 회고하고 사후에는 영광된 국립묘지를 거부하고 부하와 전우들 곁인 다부동 유학산 자락에 묏자리를 자청했다고 한다.
이 숭고하고 아름다운 백 장군의 뜻에 경의를 표하며, 칠곡군을 중심으로 구국의 다부동전투 승전기념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니 진심으로 환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수헌 전 왜관농협 조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