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허물을 범하지 않는다`
만회당(晩悔堂) 선생의 휘(諱)는 경우(慶遇)이고, 자는 태래(泰來)이며 만회당은 자호(自號)이다.
인동 장씨의 시조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의 21대주손으로 선조 14년(1581년) 1월 1일 해시(亥時)에 인동현 인선방(仁善坊)에서 증(贈)공조참판 장내범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명에 따라 여헌 장현광 선생께 나아가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린나이이지만 공부에 임하는 태도가 진지하고 스승의 한말씀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다. 만회당 선생은 스승의 훈계를 받들어서 일생동안 마음을 늦추지 않았으며, "도리(道理)가 다만 일용(日用)사이에 있으니 요순과 공명도 본분에 나아가 마땅히 행할 것을 다할 뿐이다"라고 했다.
만회당 선생은 사문기문록 끝에서 만회(晩悔)로서 자호를 삼는다고 하였으며, 만회를 당호로 삼아 여기에서 기거하면서 언행에 잘못이 없나를 늘 살폈다. 만회당 선생은 사면 벽에다 창문을 내고 이름을 붙였는데 동창은 부돈(負暾)이라 하며 아침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고, 서창은 석분(惜分)이라 했는데, 석분은 석분음(惜分陰)의 준말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촌음(寸陰)을 아까워 한다는 뜻이고, 남창은 영모(永慕)라 하여 길이 사모한다는 뜻인데 선영(先塋)이 남쪽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붙인 것이다.
증자(曾子)는 "날마다 세 번 자신을 살핀다(日三肖吾身)"고 하면서 성인의 길로 나아갔는데 선생은 이고(二顧) 삼함(三緘)으로 날마다 자신을 단속하여 군자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만년토록 잘못이 있으면 뉘우치고 고쳐서 안자(顔子)의 ‘두 번 허물을 범하지 않는다’를 본받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만회당 선생의 문집은 3권 1책이다. 1권은 선생의 유문(遺文)이고, 2권은 연보와 사우(士友)들의 만제문(輓祭文)이고 3권은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墓碣) 등이다.
선생의 생활신조는 공(恭), 경(敬), 충(忠)이라 할 수 있다. 공(恭)은 공손함인데 조심하고 신중함이요, 충(忠은) 충성스러움인데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이룬다. 만회당 선생은 일생은 산림처사(山林處士)의 표본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닌 것 같다. 어려서 피난하느라고 이리저리 유랑한 것 외에는 인동이란 향곡(鄕曲)을 장시간 떠난 적이 없고 만년에 소박한 정사(精舍)를 구축하여 만회당이란 편액을 달고 늘 자신의 언행을 살피면서 반성하고 근신하며 장수하였다.
선생은 또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선비의 기질이 있는가 하면 시묘살이를 한 효성 및 어린 이복동생을 품에 안고 밤새도록 흐느끼는 우애 또한 지극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고명(高名)한 인사들과 교우하면서 한 고을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만회당 선생은 병신년(1656년) 76세를 일기로 만회당에서 고종(考終)하였다. 선생의 유일한 유적은 경관이 수려한 곳에 지어 후학들을 계도(啓導)했던 화산서당(花山書堂). 1989년 경상북도문화재 자료220호로 지정된 화산서당은 만회당 선생이 1651년(효종 2년)에 후진 양성을 위해 석적읍 성곡리 화산(花山) 아래에 세운 건물이다. 지방사림의 뜻에 따라 1840년(헌종 6년) 석적읍 중리로 옮겨 지으면서 사당을 새로 건립, 제사를 지냈다. /이복희 리포터·칠곡향토사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