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정의 강가』 첫 시집을 낸 황정혜 시인은 경북 왜관에서 운영하는 `마루화실`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화가다. `존재의 집`인 언어로 시를 짓는 시인은 비유와 진술로 이미지를 그리고, 화가는 색채와 선으로 형상을 그린다. 따라서 시인과 화가는 묘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화가로서 황 시인의 시는 그림을 그리듯 생생한 시적 묘사가 인상적이다. 특히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황 시인은 동양화의 특징인 ‘여백의 미(美)’를 시에서도 잘 살리고 있다. 여백의 미는 `비움의 미학(美學)`에서 나온다. 여백은 채우지 못한 미완성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과 생각으로 빈 곳을 채우도록 하는 여유의 공간이다. 사랑이란 홀로 완벽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결핍을 보완해 나가면서 서로의 여백을 따뜻하게 충족시켜 나가기 때문에 아름답다. 시는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다의적(多義的)이어야 한다. 시는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사물과 현상을 다양한 비유와 상징으로 묘사해야 하므로 쓰기가 어렵다. 시는 사물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의 속성과 그림자를 통해 사물과 현상에 다가가는 문학 장르다. 시의 이러한 속성을 고려해 황정혜 시인은 『자정의 강가』 첫 시집 서사(序詞)에서 "감잎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공기를 울리며 두터운 소리로 귀를 가득 채워 왔다. 물의 파문처럼 에밀레종의 진동처럼 떨어지고 나서도 한참을 울리는 여음은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다. 소리는 유형(有形)의 그림자일까?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안을 수 있다면... 새어나가는 물처럼 다시 잡을 수 없더라도 시(詩)의 언어로 잠시 붙들 수만 있다면..."이라고 적었다. 에밀레종의 여음은 소리가 숨 쉬는 여백 같은 침묵이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눈을 감고 마음의 귀로 듣는 이 침묵의 여음은 한참 동안 남아 있으리라.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는 "마음에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나온다.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바람 불지 않아도 가슴속에 핀 꽃은 흔들리고, 비가 오지 않아도 눈물속에 핀 꽃이 젖어드는 것처럼 인간은 누구나 평생 지울 수 없는 상흔(傷痕)으로 아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는 "시는 삶의 아픔과 상처, 눈물 같은 얼룩을 지우고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라고 밝힌 황 시인의 시론과 일맥상통한다. 황 시인은 인생에 상처의 흔적과 얼룩이 얼마나 쌓였기에 `바다의 한구석에 가득 찬 폐기물`로 비유했을까? 아무리 파도 쳐도 지워지지 않는 바다의 수평선 같아 황 시인은 `파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당신`으로 묘사했다. "파도 파도 다시 차오르는 바다/ 출렁이다 흔들리다 밀려가는 거품/너의 발목을 잡고 대양으로 끌고 가고 싶어// 커다랗게 패인 바다의 한구석은/ 어김없이 폐기물로 가득 차 있어// 다시 차오르는 물거품/ 파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파도/ 파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당신 -황정혜 시 <파도, 물거품> 중에서 황 시인의 『자정의 강가』에 실린 66편의 시 중 <사막을 건너는 여자>가 주목받고 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노숙자처럼 나그넷길을 가는 인간 개개인으로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막을 건너야 한다. 사막을 건너는 동안 무기력과 고통이 따른다. 고해(苦海) 같은 인생의 사막을 걸어가면서 지독한 외로움과 적막함을 극복해야 한다. 프랑스 시인 오르텅스 블루의 시 <사막>은 이를 나이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4행의 짧은 이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사막의 외로움에 대한 무게감은 엄청나다. 이응준 시인은 "사막에서 눈을 감으면 네가 웃어주던 청춘은 파도 소리"라고 읊었다. 특히 황 시인의 <사막을 건너는 여자> 마지막 행 "아무도 모래 속 발자국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가 강한 여운을 남기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사막의 모래 위에 생긴 발자국은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그 사막의 또 다른 모래에 의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사막은 처음도, 끝도 모래가 보이는 `모래의 바다` 같다. 사막의 모래처럼 무한히 똑같이 반복되는 고통의 삶 속에서 인간은 허무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이를 두고 쇼펜하우어는 "삶은 진자(시계추)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며 특이하게 천국과 지옥을 고통의 유무로 구분했다. 고통의 사막을 건너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 정신을 놓쳐 버릴 때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때로는 넋을 잃은 채 이 시의 실성한 여자처럼 집 없는 노숙자로 떠도는 나그네에 비유된다. 사막의 발자국이 지워지는 것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세상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다. 바람 따라 만들어지는 사막의 언덕은 고난의 발자취가 쌓인 역사의 무덤일지 모른다. "아무도 모래 속 발자국 발견하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이 시구는 정신없이 사막을 걷는 현실적 인간은 고해(苦海) 같은 인생의 사막 이면에 쌓여 있는 상흔(傷痕)을 망각할 수밖에 없어 끝없이 보이는 사막에도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모래 위 발자국인 `현재`와 모래 속 사라진 발자국인 `과거`가 `오래된 미래`처럼 펼쳐지는 사막을 건너는 여자를 보라. 황정혜 시인은 <사막을 건너는 여자>를 "역 앞 김밥집에 앉아서/ 갈 길이 바쁜 여자/ 가야 할 곳이 분명한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 사막에 던져진 사람은 노숙자보다 더 비참하게 보일 수 있으나 사막을 성공적으로 건너려면 정확한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사막에서 배회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란 사막을 지나가는 나그네는 각자의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고 목적의식을 지녀야 방황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그네와 노숙자가 도달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는 어디일까? 황 시인은 이 시에서 "아무도 묻지 않는 목적지/ 지금쯤 노숙은 성숙하여/ 길을 허리띠 두른 집 한 채 지었을까?"라고 되묻는다. `당신은 인생 목적지가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자신도 불투명한 목적지를 타인에게 묻지 않는 것이 인생인 듯하다. 황 시인은 "노숙은 성숙하여/ 길을 허리띠 두른 집 한 채 지었을까?"라는 시구에서 나그네가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이 고인 것처럼 그동안 노숙하며 지낸 시공간이 허리띠처럼 이어져 자신만의 인생의 집을 어떻게 짓고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어느 시인은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길이 막히거든 노숙을 해봐라. 달빛 아래 그 어디로 길이 열리는지 먼 타관으로 가서 노숙을 해봐라"라고 권유한다. 황정혜 시인도 자신의 시 <집은 늘 거기에 있네>에서 집을 우주로 보았다. 내가 하루를 마치고 편안하게 쉴 안식처, 집으로 돌아가듯 인생 길 모두 끝마친 나그네는 우주의 극히 미세한 먼지로 사라지리라. 인간 각자가 우주 같은 그 집에서 새순을 틔우고, 저마다 유일한 꽃을 피워 존재의 향기를 공유하는 것이 인생사다. 황 시인의 시로 돌아가 보자. "아버지가 말뚝을 박고 있네 누군가는 말뚝에서 싹이 날까를 의심하였지만 나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네 나는 보았네 메마른 말뚝에서 새순이 나고 꽃피는 것을 아버지가 말뚝을 박고 있네 당신의 모진 생애도 언 땅에 말뚝을 박을 때면 온 우주가 흔들렸네 쩌렁쩌렁 어린 가슴을 울리는 소리, 하여 내 심장에서 푸른 순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은 당신의 생을 송두리째 박아놓은 이승의 말뚝에 새로이 생이 움트는 것이네 당신의 아이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은 살 속을 파고드는 그 망치 소리 때문이네" -황정혜 시 <집은 늘 거기에 있네> 중에서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약자로 살아가면서 가족과 세상이 잠든 깊은 밤 혼자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하는 존재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는 아버지처럼 말문을 열지 못하는 자정에 강가를 서성이는 사람을 위해 황 시인은 <자정의 강가>라는 시에서 "강의 어귀 작은 물새의 깃털 속에 잠들었는지// 움푹 패인 모래톱에 갇혀 윙윙 울리는 소리// 강의 귓바퀴가 가렵다 아직 새벽은 먼데// -나 할 말 있어 출렁, 느닷없이 울리는 벨 소리/ 강가를 서성이는 사람들 아직 말문을 트지 못했다"라고 읊었다. `자정의 강가`에 서 있는 나그네는 `사막의 나비`가 `파도 속 고래`를 만나기 위해 바다로 날아가는 꿈을 꿀 수 있을까? 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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