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문협(지부장 박경한)은 지난 12월 5일 옥명선 시인에게 2025년 칠곡문학상과 상금을 수여했다. 옥명선 시인은 2024년 10월 첫 시집 『이만큼 행복한 날의 풍경』(출판사 청어)을 출판했다.
▶누군가의 눈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불꽃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은 전생에 다하지 못한 인연과 사랑이 현생의 찰나와 부딪히며 바로 일으키는 불꽃일 수 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는 끝사랑을 못 잊는다"고 한다.첫사랑은 심장이 멈출 듯한 강렬한 불꽃으로 상대의 눈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눈 속에 영원히 유영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남기기도 한다. 논리나 이유를 따지기 전에 이미 영혼이 먼저 서로를 감지했기에 거역할 수 없는 순간이다. 불꽃 같은 사랑은 손으로 잡을 수도, 의지로 조절할 수도 없다. 운명처럼 타 들어온 불꽃은 가장 화려한 순간에 스스로를 소멸시킨다. 시인의 첫 연 "누군가의 눈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불꽃"은 찰나의 눈부심과 설렘처럼 눈에 보이지 않아 곧 사라질 것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순간의 그리움이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잔상은 불꽃이 소멸한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빛으로 남으리라. ▶한 생애를 태우기 위해/ 빗물에 젖어
한 생애를 뜨겁게 태우기 위해 오히려 차가운 빗물에 젖어야 한다는 이 구절은 역설적이고 애절한 사랑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삶을 불태우며 그와 함께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빗물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상황이다.
불은 비에 젖으면 꺼져버린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태워버리는 격정적 불꽃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뜨겁게 오래가는 사랑은 빗물을 마중물처럼 맞으며 비를 기꺼이 맞는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사랑은 정서적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의지와 노력의 산물인 기술이다"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기술은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아니라 종합 예술로서 아트(art)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소유하는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닦는 ‘존재의 예술’이다.에리히 프롬의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사랑`은 우산 하나 받쳐 들지 않고 비에 젖으면서도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숭고한 실천이다. 순간의 감정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내면의 능동적인 힘을 기를 때 서로를 향한 불꽃은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불과 물이 극단적으로 부딪힐 경우 서로는 고통마저 사랑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빗물에 젖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 고난을 함께 나누며 젖은 몸을 부둥켜안은 채 서로의 체온으로 불꽃을 지키겠다는 결연한 실천이다.서로의 삶을 적신 빗물이 다 마를 때까지 타오르는 불꽃이야말로 시인의 `줄불놀이`와 칠곡군 지천면 `낙화놀이`처럼 어둠 속에서도 `눈부신 사랑의 아트`이리라.▶타오르지 못한 마음도/ 불꽃이 되려 했다1989년 나온 가수 조정현의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라는 노래가 있다. `타오르지 못한 마음도 불꽃이 되려 했다`는 시구는 그의 "외로움에 가슴 아파도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라는 가사를 생각나게 한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다. 타오르지 못해 억눌린 슬픔이나 고통, 심지어 사랑하기 힘든 조건까지 모두 불꽃의 일부로 만들겠다는 화자의 지독한 사랑의 의지가 숨어 있다. 줄불놀이를 하면서 숯가루가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부수어 불꽃을 준비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활활 타오르지 못하고 연기만 내뿜던 아픔과 상처마저 끝내 불꽃이 되려 했다는 표현은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으로 승화하고자 한 시인의 치열한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비록 온전히 타오르지 못했을지라도 불꽃이 되려 했던 시도 자체가 이미 뜨거운 사랑이었다는 의미다. ▶나는 줄 위에서/ 당신은 관객이 되어이 시구는 줄불놀이와 니체의 인간 조건을 겹쳐 놓는 은유로 읽힌다. 줄불놀이는 공중에 길게 맨 줄 위에 숯가루가 든 봉지를 매달아 불을 붙이는 놀이로 불꽃은 줄을 따라 타오르다 결국 모두 연소되고 줄마저 재가 되어 사라진다. 줄은 불꽃을 지탱하는 생명선이자 불꽃과 함께 소멸할 운명을 이미 내포한 죽음의 선이다. 시 속의 ‘나’는 바로 그 줄 위에 놓인 존재로, 온몸을 불사르며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지만 불타는 찬란함은 필연적으로 소멸을 향한다. 불이 다 타버려 줄마저 끊어지는 순간 ‘나’에게는 더 이상 머물 곳이 없다. `나`는 한 생애를 줄 위에서 걸어가면서 `당신`이라는 관객에게 단 한 번의 가장 뜨거운 빛을 보여주고 사라지는 존재가 되리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하나의 밧줄이다. 짐승과 초인 사이에 묶여 있는 밧줄, 심연 위에 걸린 밧줄이다"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걸린 밧줄이며, 심연 위에 놓인 불안정한 존재라는 것이다. 밧줄은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건너가야 할 통로이고, 그 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는 의미다. 줄불놀이의 줄 위에 선 ‘나’ 역시 정지해 있을 수 없는 존재로, 줄을 타고 가면서 타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에 놓여 있다. 그리고 타오르면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선악의 저편』에서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라고 한 니체의 경구는 관객인 ‘당신’에게도 적용된다. 줄 위에서 타오르는 동시에 소멸하는 ‘나’를 응시하는 `당신` 역시 발화(생성)와 소멸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라는 문구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어둠과 대면할 때 일어나는 존재론적 변화를 성찰하게 한다. 이는 우리가 평소 외면하고 싶어하는 삶의 고통과 상처를 의미한다. 줄불놀이에 들어가기 직전의 캄캄한 밤하늘은 깊은 심연과 같다. 이 순간은 고통과 상처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단순한 관찰에 그치지 않는다. 줄을 감싸고 있는 어둠의 심연이 나의 내면을 응시하며 존재의 본질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숯가루가 제 몸을 부수어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듯이 인간은 고통과 직면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자각한다. 타오르지 못한 상처마저 불꽃이 되려 했다는 시인의 고백은 심연을 사랑의 의지로 바꾸려는 치열한 노력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것이면마지막 이 구절은 자신의 모든 존재를 남김없이 소진한 뒤에 도달하는 궁극적 자족의 경지를 읊은 것으로 보인다. 줄불놀이의 불꽃은 어둠 속에서 제 몸을 부수어 찬란한 빛을 만들어내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처럼 사랑 또한 짧고 강렬한 순간의 완성을 위해 한 평생을 내던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이 구절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화려한 불꽃이 어두운 허공을 수놓는 순간 오직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의 눈동자에 빛이 담기는 찰나의 마주침이다. 비록 불꽃이 꺼진 뒤에 남는 것이 차가운 재와 정적이라 할지라도 `당신`이 `나`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지켜보았다는 사실만으로 내 삶의 소명과 의미는 충분했다는 선언이다. 더 이상의 미련이나 보상, 영원을 구걸하지 않는 화자의 결연한 태도는 순수한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그것이면 되었다’라고 결론을 지은 뒤 다시 ‘그것이면’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반복이 눈에 띈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확신이자 스스로를 위로하는 고요한 다짐이다. 잠시 타다가 사라지는 불꽃은 허무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머물다 간 불꽃은 `영원 같은 찰나` 그것이다.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