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상 탐구의 학문에 너무나 익숙하여 주체적 삶을 완성하는 학문으로서의 유학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서구의 학문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부터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객체를 대상화하여 인식하는 것을 학문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학은 가정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적 삶을 살며 인간이 이상적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각자가 본분을 지키며 각자의 본성을 실현하는 관계적 삶을 중시하였다.
모든 존재는 하늘인 진리를 동심원으로 삼아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며 산다. 유학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내재된 하늘인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 관계적 삶을 평화롭게 살며 삶의 질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삶으로 여겼다.
이들은 인간의 신분을 나누어 치자와 피치자로 나누고 피치자는 사회 전체를 위하여 생산을 담당하고 치자는 마음을 다하여 이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였다. 치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본성 실현을 통한 인간완성의 삶이었다.
시대가 변하여 고대 유학이 기획한 사회적 신분제도와 종법적 대가족제는 현대적 의미가 상실되었지만, 인간완성의 학문으로서의 유학은 현대를 넘어 미래의 학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다린다.
공동체적 삶 가운데 자기완성의 삶을 지향
`대학`의 팔조목의 전반부는 격물과 치지, 성의, 정심, 수신으로 이 모든 것은 공동체적 관계적 삶 가운데서 자기완성의 삶을 지향한다. 사람들과 사태를 마주해서 사람과 사태의 객관적 법칙보다는 사람과 사태를 마주하여 그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며 그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응대하고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선한 삶인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주체적 삶의 고양과 완성을 학문의 목표로 삼는다.
주체적 삶의 물음을 던지고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서 실천하는 것이 반복됨을 통하여 자신의 사람과 사태에 대한 이해능력과 실천능력이 향상됨을 지향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식능력인 지혜가 깊어지고 실천능력인 사랑의 능력이 확충됨을 통하여 인격의 고양과 완성을 지향한다.
사물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지선 곧 삶의 도의 인식과 실천을 통한 자기완성의 삶이다. 객관적 법칙에 대한 인식이론을 정립하지 못한 것은 약점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자기완성 방법에 대한 정립은 깊고 치밀하다.
객관적 방법에 의해서는 객관화된 사물만 인식할 수 있지만 유학의 자기완성의 철학을 통해서는 인간의 마음과 마음에 내재된 창조적 이법을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다. 창조적 이법에 도달하면 현상의 배후에 있는 형이상의 자연의 원리에 대한 인식도 열려있다고 한다. 천인합일을 필자는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자기완성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완성을 도와
`대학`의 제가와 치국과 평천하는 자신의 인격을 완성한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완성을 도와주는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항상 걱정인 입장에서 보면 유학은 한가한 이론 같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할 시대도 이제 지나갔다고 본다.
지금 인간은 생산이 모자라 걱정인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생산과 소비를 걱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이 않은가?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도 인간은 더 많은 지식으로 자연을 더욱 철저하게 지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지식은 자기완성과 삶의 고양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비판과 분석의 칼날을 더욱 예리하게 만든다. 학문에서 비판이 중요하지만, 자기완성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남을 비판하는 자를 보면, 공자가 자공에게 한 말이 떠올리게 된다.
자공이 사람들을 비교하기를 좋아하였다. (공자가 이것을 보고) 사(賜, 자공의 이름)는 현명한가? 나는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논어·헌문`, ”子貢方人,子曰賜也賢乎哉. 夫我則不暇.“)
공자는 학문을 통하여 사람됨을 완성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자기완성에 바빠서 남들을 비교할 시간이 없다고 말하며 자공을 꾸짖고 있다. 자기완성을 위한 인간의 삶에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대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학문에 끝이 없듯이 자기완성의 학문에도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중용`에서는 그 목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희로애락이 발하기 이전을 중이라고 한다. 발해서 모든 것이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 중은 천하(모든 일)의 커다란 근본이고 화는 천하(모든 일)에 통달되는 도이다. 중화를 극진하게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얻어 질서가 잡히고 만물이 잘 자란다.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중화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게 실현하게 되면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학의 천지인(天地人) 삼재 사상이다. 유학에서는 하늘과 땅은 생명을 낳고 기르는 존재로 이해하고 인간은 하늘과 땅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고 도와야 되는 존재이다.
`주역`으로부터 시작된 천지인 삼재사상은 우리나라의 전통사상에서도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계승되어 왔다. 세종대왕은 조선왕조의 경연제도를 완성하며 자신이 20여 년 동안 경연을 주도하고 참여하며 유학사상에 대한 완숙한 이해에 도달하여 그 꽃으로 훈민정음 문자를 창제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의 기본원리가 천지인 삼재사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다. 자기와 타자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 천지와 자연이 하는 사업의 완성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학의 학문관은 이 시대가 회복해야 하는 중요한 학문관이다. 육체와 정신의 묘합으로서의 인간을 온전하게 인식하면 물질로서만 인식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방법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을 다하면 인간의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때의 하늘은 물론 단순한 물리적 하늘만은 아닐 것이다.
/이광호·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