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2시38분경 F-15K 전투기가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숨진 칠곡군 유학산은 피로 물들인 6·25전쟁 최대 격전지였다. 기체는 물론 조종사 2명의 시신이 토막 나 섞인 결과 엑스레이 검사를 통해 신원을 확인했을 정도로 현장은 참혹했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칠곡군 석적읍 성곡리에 걸쳐 있는 유학산은 전투기 착륙지인 대구 공군기지와 가까워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다. 공군은 통상적 훈련이었다고 했지만 이날 F-15K 전투기는 짙은 안개 등 악천후 속에서 고도를 낮추다가 참상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기상악화와 기체결함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철저한 조사가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6·25전쟁 당시 839m 유학산 고지는 5번도로와 25번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이다. 즉, 이 고지는 다부동전투 최고의 요지로 국군과 북한군은 반드시 사수해야 했기에 그 만큼 희생이 컸다.
국군 제12연대가 사단 일선 중앙의 수암산에서 유학산 일대를 담당했다. 8월 13일 아침 왼쪽으로부터 제2대대를 수암산에,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해 놓고 제2봉인 837고지에는 제1대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837고지는 국군 1대대 병력이 배치되기 전에 북한군이 먼저 점령해 있었다. 이로 인해 837고지의 반격과 후퇴는 유학산 일대 전투에서 가장 치열하게 계속됐던 것이다.
대구 진입로를 차단하는 제1의 요새인 유학산 방어선이 북한군의 강공세로 동명·지천까지 밀렸으나 UN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한미 연합작전으로 다시 격퇴시켰다. 유학산은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9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면서 수만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장(戰場)이었다.
8월 18일 북한군의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졌고, 결국 정부를 부산으로 급히 옮겨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계속됐다.
8월 21일 인민군이 전차를 앞세워 대규모 야간역습을 감행하자 미군은 가산면 다부리 계곡에 처음으로 전차를 출동해 최초의 전차전을 벌였다. 미군 병사들은 불덩이 철갑탄이 어둠을 뚫고 계곡으로 날아가는 게 볼링공 같다 해서 `볼링장(bowling alley)전투`라고 불렀다.
백선엽 장군은 당시 다부동전장에서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며 배수진을 쳐 후퇴를 막았던 일화는 유명하다.
현충일이 돌아오면 백선엽(현재 98세) 장군은 다부동 전투현장을 한 해도 빠짐없이 찾아와 처참했던 그날을 회고하고 사후에는 영광된 국립묘지를 거부하고 부하와 전우들 곁인 다부동 유학산 자락에 묏자리를 자청했다고 한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은 1만5000여명 중 전사자 2300여명을 포함해 사상자 1만여명, 인민군은 3만여명 중 전사자 5690명 등 2만4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낙동강과 다부동 방어선이 뚫렸다면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은 없을 것이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