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배고프다(I am still hungry)."
2002 한일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정한 뒤에도 만족하지 않았던 거스 히딩크 감독의 이 한마디는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명언으로 남아 있다. 목표를 이뤘다고 안주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했던 그의 리더십은 2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소환되고 있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무기력하게 탈락하며 12년 전 `브라질 참사`를 되풀이하자, 체육계 안팎에서는 히딩크 감독이 남긴 성공의 원칙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최근 축구계를 향한 비판의 핵심은 현 대표팀을 둘러싼 인맥·카르텔 중심의 선수 선발과 경직된 전술 운영이다. 이는 과거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의 고질적인 병폐를 과감히 깨뜨리고 4강 신화를 일궈낸 원동력과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지적이다.홍명보 감독은 현지시간 29일 오전 열린 사퇴 기자회견에서 준비한 입장문을 일방적으로 읽은 뒤, 취재진의 질문을 전면 거부한 채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찔러 넣고 걸어 나가는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참패의 결과 앞에서도 끝까지 축구팬과 국민을 무시하고 기만하는 태도로 일관한 것이어서 대중의 공분을 더욱 걷잡을 수 없이 키우고 있다.지난 30일 홍명보 전 감독의 귀국 현장은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에 분노한 팬들의 고성과 욕설로 가득 찼다. 새벽부터 인천공항에 모인 팬들은 홍 감독을 향해 "홍명보 나가", "골을 넣으랬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라고 했니", "손흥민을 넣으랬지. 누가 주머니에 손을 넣으라고 했느냐”라며 격렬한 분노를 쏟아냈다.온라인상에는 미국 국적의 작성자가 올린 살해 예고 글이 게시되는 등 심각한 신변 위협까지 발생하고 있다. 전국 각지의 식당과 편의점은 물론 고속도로까지 `홍명보 출입 금지` 표지판이 등장했다. 홍명보는 일상적인 이동과 생활조차 불가능한 처지에 놓였다. 사면초가에 몰린 그가 과연 발을 붙이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학연·지연 타파, 카르텔 밖에서 발굴한 원석들2002년 당시 한국 축구는 특정 대학(연세대·고려대)과 혈연·지연 중심의 강한 파벌 문화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감독이었던 히딩크는 축구협회 내부의 인맥 카르텔과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기존 명성보다 실력과 체력을 우선시하며 직접 전국을 돌고 선수들을 점검해 무명에 가까웠던 신예들을 발굴했다.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대표팀 23명 가운데 연세대와 고려대 출신은 6명(26%)에 불과했다. 만약 히딩크 감독이 기존 학연과 카르텔의 압력에 굴복했다면 명문대 출신이 아니거나 일본 J리그에서 뛰던 박지성, 이영표, 김남일, 송종국 등은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가 축구계에서 지배적이다. 그는 지연과 학연 대신 철저한 무한 경쟁을 도입했고, 실력 중심의 선발 원칙은 대표팀 내부에 건전한 긴장감과 경쟁 문화를 만들어냈다.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는 실력과 원칙보다 학연·지연·혈연을 앞세워 `우리 편`, `우리 사단`, `우리 클러스터`를 만드는 데 있다. 일단 같은 편이 되면 서로를 감싸고 요직을 독점하며 조직을 사유화하려 한다. 축구계에서 불거진 정인규·홍명보 논란 역시 이런 폐쇄적 인맥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이 나온다. 공정한 경쟁보다 측근 중심의 의사결정이 반복되면 조직은 활력을 잃고, 새로운 인재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문제는 이러한 문화가 축구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서도 특정 집단이 모든 것을 주도하며 마치 영원한 `자기 공화국`을 만들 수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져 있는 모습이 반복된다. 그러나 어떤 조직도 독불장군이나 사단만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 실력과 공정한 경쟁, 투명한 시스템이 인맥과 편 가르기를 대신할 때 비로소 한국 축구도,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나는 아직 배고프다", 고집이 아닌 `상대 맞춤형 전술`히딩크 감독의 진짜 강점은 선수 개인의 능력보다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에 있었다. 그는 경기 전부터 선수 11명 모두에게 자신의 역할은 물론 동료가 어느 순간 어느 공간으로 움직이고, 공을 받으면 어디로 연결해야 하는지까지 반복 훈련을 통해 몸에 익히게 했다. 선수들은 경기 중 별도의 지시가 없어도 약속된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간을 만들고 메웠으며, 공을 가진 선수는 언제든 패스할 동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세계 최강팀을 상대로도 이러한 조직력이 빛을 발했고, 후반에는 공격수 추가 투입과 포지션 변화 등 상대에 맞춘 `플랜B`를 과감하게 가동하며 승리를 만들어냈다.그러나 홍명보 감독은 대회 내내 "상대가 누구든 우리 축구를 하겠다"는 기조를 유지했지만, 경기에서는 약속된 움직임과 조직적인 패턴 플레이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축구계에서는 "거의 100%에 가까운 패스 성공률을 자랑하는 이강인조차 공을 연결할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선수들의 공간 침투와 연계 움직임이 부족했다"며 "누가 언제 어느 공간으로 파고들 것인지에 대한 전술적 약속이 보이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개인 기량에 의존한 공격은 상대 수비를 흔들지 못했고, 결국 답답한 경기 운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특히 손흥민의 활용을 둘러싼 비판도 적지 않다. 손흥민은 단순히 득점을 올리는 공격수가 아니라,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상대 수비수 두세 명의 집중 견제를 끌어내 다른 공격수들에게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선수다. 현대 축구에서 이러한 공간 창출 효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공격 전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그럼에도 홍명보 감독은 일부 경기에서 손흥민을 선발에서 제외하거나 출전 시간을 제한하는 선택을 했다. 이를 두고 축구계에서는 "상대 수비를 흔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전술 자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됐으며, 일부에서는 선수 운용의 배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다만 이러한 의도에 대해서는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전문가들은 "히딩크의 `우리 축구`는 강한 체력과 철저한 준비를 바탕으로 상대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연한 축구였다"며 "반면 이번 대표팀의 `우리 축구`는 상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같은 전술과 교체 패턴을 반복한 결과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실패를 초래했다"고 평가한다.2002년의 4강 신화는 축구협회의 주류 카르텔을 배제한 공정한 선수 선발과 상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한 전술적 유연성, 그리고 11명의 선수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 조직력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2026년 대표팀이 12년 전 브라질 월드컵의 실패를 되풀이한 현실은 한국 축구가 히딩크 감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인 `공정`과 `전술적 유연성`, 그리고 철저한 조직 축구를 잊고 다시 인맥 중심의 축구와 경직된 운영으로 퇴보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카르텔에 갇힌 한국 축구, 히딩크에게 답이 있다정약용의 『목민심서』는 탐관오리의 폐해를 단순한 부정부패에 그치지 않고, 청렴하고 유능한 인재가 설 자리를 빼앗아 결국 백성을 더 큰 고통에 빠뜨리는 것으로 보았다. 오늘날 한국 축구도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감독과 축구협회장 자리는 개인의 영예가 아니라 한국 축구의 미래를 책임지는 공적 자리인 만큼, 그 자리를 가장 유능한 사람이 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축구계 안팎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진 홍명보 감독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스스로 거취를 결단하고, 한국 축구의 인맥 카르텔에서 자유로운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차기 감독과 협회장은 학연과 인맥이 아니라 실력과 공정성, 스포츠맨십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한국 축구를 다시 경쟁력 있는 팀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독불장군은 없다. 감독은 혼자 영웅이 되는 자리가 아니다. 훌륭한 선수가 있어야 훌륭한 감독이 탄생한다. 히딩크가 오늘날까지 한국 축구의 영웅으로 기억되는 이유도 자신의 명성을 앞세웠기 때문이 아니라 박지성, 이영표, 안정환, 김남일, 송종국 등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시켰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빛날 때 감독도 함께 빛나는 것이 스포츠의 본질이다.반대로 감독이 자신의 존재감을 선수보다 더 앞세우거나, 팀의 승리보다 자신의 색깔과 권위를 우선한다면 그것은 리더십이 아니라 독선이다. 만약 손흥민의 출전 제외나 기용 방식이 팀 승리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 아니라 감독 자신의 판단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상생과 협력을 중시하는 현대 스포츠 정신에 역행하는 처사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진정한 지도자는 선수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돕는 사람이다. 감독이 영웅이 되는 길은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마음껏 뛰고 빛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데 있다. 그것이 히딩크가 보여준 리더십이었고, 오늘날 한국 축구가 다시 찾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다.이성원 대표기자 newsi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