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영웅인 백선엽(한국나이 101세) 예비역 대장의 사후 장지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법 개정으로 국립 현충원 안치가 불가하면 6·25전쟁 당시 다부동전투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낸 칠곡군 다부동전적지에 묘지를 마련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백선엽(白善燁) 장군은 지난 2018년 11월 주한미군이 열었던 백수(白壽·당시 한국 나이 99세)연에 참석할 정도로 건강이 좋았다. 白壽(백수)는 아흔아홉 살을 말한다. `百`에서 `一`(하나)을 빼면 99가 되고 ‘白’ 자가 되는 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병원에 입원한 백 장군은 노환으로 현재 위독한 상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김홍걸 국회의원을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 중심으로 백 장군이 일본의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친일파로 규정, 사후(死後) 현충원 안장에 반대했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은 지난해 6월 한 인터뷰에서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해 간 1943년 초 간도 지역에는 1930년대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항일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없을 때였다”고 회고했다. 다음은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정용석 명예교수의 `일요서울`에 게재된 칼럼내용이다.
백 장군은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실상 김일성은 백 장군의 간도특설대 부임 1년 전인 1942년 이미 소련으로 넘어갔다.
백 장군은 일본군 중위로 8·15 해방을 맞았다. 그는 귀국 후 평양에서 반공·반소련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활약하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철저한 반공주의자다. 북한의 6·25 기습남침 땐 육군 대령으로 개성지역을 지키는 1사단장이었다.
북한은 주한미군 철수 1년 만에 기습남침을 자행, 낙동강까지 다다랐다. 대구와 부산만 겨우 살아 남았던 일척간두의 위기였다. 이 때 백 장군은 6·25 최대 격전지였던 다부동전투에서 후퇴하는 한국군을 가로막고 섰다. 그리고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며 미군도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할 순 없다며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고 독려, 다부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보병 1사단의 백 장군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했다. 미군들은 백 장군 부대를 “가장 잘 싸운 부대”라고 극찬했다. 백 장군은 1951년 11월 야전전투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돼 지리산 빨치산 소탕작전도 지휘했다. 1952년 31세로 한국군 최연소 육군참모총장, 33세 한국군 최초의 대장, 1957년 두번째로 육군참모총장에 보임, 공산군 격퇴를 진두지휘한 국군의 상징이다.
백 장군은 전선에선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고 외칠 만큼 임전무퇴의 용장이면서도 부하 장병에게는 따뜻한 어버이 같은 덕장(德將)이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존댓말을 썼고 길가에 군인이 걸어가면 달리던 차를 세워 태우곤 했다. 여권에서 백 장군을 친일로 몰자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고 반박했다.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 반대는 충남 현충사에 모신 이순신 장군 묘를 파묘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뿐만 아니라 백 장군 현충원 안장 거부는 “6·25 전쟁 영웅”을 친일파로 몰아 북한의 적화남침을 북한 주장대로 친일·친미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해방전쟁"으로 정당화해주려는 붉은 책모가 아닌가 의심된다.
백선엽 장군 측은 이전에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장지로 검토한 바 있다. 몸이 건강할 때 현충일을 맞아 다부동 전투현장을 찾았던 백 장군도 세계전투사에 길이 빛나는 유학산 다부동전투를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탓인지 사후에는 영광된 국립묘지보다는 부하와 전우들 곁인 다부동 유학산 자락에 묻히고 싶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군은 민주당 소속 칠곡군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제7회 낙동강세계평화 문화대축전` 개막식에서 백 장군에게 명예 칠곡군민증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