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가산(架山)과 정상의 가산바위에 등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와 동명면 남원리 일부에 걸쳐 있는 가산산성은 아래 진남문부터 가산 정상 외성까지 절경과 볼거리가 많아 잠시라도 눈을 뗄수 없다. 칠곡군 가산이 이렇게 사계절의 풍광 등으로 명산인데도 불구하고 팔공산과 연결, 대구 ‘팔공산’이라는 이름에 밀려나 안타깝다. 트레킹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가산산성 둘레길은 진남루~가산바위~유선대~용바위~동문~진남문의 5km 구간이다. 특히 칠곡 지명의 유래가 가산에서 유래한 만큼 군민과 칠곡군 당국은 가산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가산 정상(높이 901.6m)에 위치한 가산바위는 상면이 260여㎡(80여평) 규모로 절삭기로 깎아 놓은 듯한 완전 평면이다. 가산은 가산바위를 포함한 산 정상이 7개의 봉오리로 에워싸여 ‘칠봉산’(七峰山)이라고도 한다. 고을 이름 ‘칠곡군(漆谷郡)’에서 칠곡(漆谷)은 과거 ‘칠곡(七谷)’으로 사용했다. 7개의 봉(七峰)이 7개 골짜기(七谷)를 이룬 데서 ‘칠곡(七谷)’이라는 지명이 유래한 만큼 가산은 칠곡의 어머니 같은 산이다. 이후 七(일곱칠)이 漆(옻칠)자로 바뀌었다. 이같은 칠곡의 지명 유래를 반영한다면 일제 잔재인 ‘왜관’(倭館·왜인-일본인의 관사) 명칭 변경과 함께 칠곡의 한자도 현재 漆谷이 아니라 ‘七谷’으로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리라. 가산바위 양쪽으로는 가산산성 내성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남쪽 내성은 현재 복구 공사 중이다. ‘호국평화의 도시’ 칠곡군은 조선시대에도 군사적 요충지였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축조됐다. 얼마나 완벽한 방어를 하려고 했기에 외성, 중성벽, 내성 세 겹으로 쌓았을까? 외침이 많았던 우리나라에는 1200여개의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중에서 외성·중성벽·내성 삼중곽 형태의 산성은 극히 드물어 가산산성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1639년(인조 17년) 9월에 축조를 시작해 1640년 4월에 내성을 완성했으며, 이후 1741년까지 100여년간에 걸쳐 지금의 가산산성(사적 제216호)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산성 전체 둘레는 11.1Km로 한양도성, 부산금정산성, 북한산성, 남한산성 다음인 다섯번째로 길며, 면적은 2.2㎢로 네번째로 넓다. 가산산성 출구로 외성 남쪽 홍예문(虹霓門) 형식의 진남문(鎭南門) 위에 누각이 세워져 있고 ‘嶺南第一關防’(영남제일관방·방어하는 영남 제일의 요새)이란 현판이 보인다. 경산,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가산산성에 속했다. 1640년 가산산성을 축조하고, 팔거현이 승격한 칠곡도호부 관아(관청)를 가산산성 내에 두었다. 이는 부산~대구~문경새재~충주~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낙동강을 통한 왜구들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9년(순조 19년) 주민들이 높은 가산을 오르내리면서 조세 납부 등 볼일을 봐야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팔거현(현재 대구 북구 읍내동)으로 관아를 옮겼다. 이는 경상감사로 있던 추사 선생의 아버지 김노경의 장계(狀啓)에 의해 이뤄졌다. 그후 1914년 일제강점기 때 칠곡군청이 왜관으로 이전했고, 칠곡군은 칠곡군청 소재지를 왜관으로 옮긴 지 100주년이 되는 2014년 3월 1일 ‘칠곡군 왜관개청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바 있다. 당시 지역기관-단체와 군민들의 600여종 수장품을 담은 타임캡슐을 칠곡군교육문화회관 소공연장 앞 마당에 매설했다. 칠곡군의 역사와 발자취를 100년 뒤 후손에게 물려줄 계획이다. 이성원 편집국장 newsi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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