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 번쯤은 올라가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지내왔는데, 어쩌다가 지난주에야 백두산에 올랐습니다. 백번 올라가야 겨우 두 번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천지(天池)라고 해서,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속설로 보면, 천지 곁의 기상대에서 하룻밤을 지낸 결과, 저녁에도 천지를 제대로 관람했고, 그 다음 날 새벽에 또 완전한 모습의 천지를 구경했고, 서쪽 능선을 따라 서파(西坡)에서 올라간 그 다음 날 또 천지를 제대로 관람했으니, 세 번가서 세 번 모두 제대로 천지를 보았으니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행한 일행들도 복 많이 받은 사람들이 모인 탓으로 그런 행운을 얻었다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기쁜 모습을 띠었습니다.
천지는 역시 장관이었습니다. 저런 영걸스러운 산 기운, 물 기운 때문에 우리나라가 5천 년의 유구한 문화·문명을 이룩하면서 살아왔으리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천지의 우람함과 넓음도 보았지만, 백두산 오르는 길가의 야생화 꽃들의 아름다움, 도로 양옆의 원시림의 그 장대한 수목, 장백산 폭포, 깊고 깊은 협곡의 웅장함, 정말로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자 성스러운 산이었습니다.
다산은 1789년 28세 때, 백두산으로 유람 가는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1729〜1796) 시인에게 축하의 글을 올리면서 백두산 이야기를 했습니다. “백두산은 `산해경(山海經)`에는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지리지(地理志)`에는 장백산이라 했다. 그 산맥이 서쪽으로 선비(鮮卑)에서 일어났고, 동북쪽으로 흑룡강의 위에 이르고, 그 한 가닥이 남으로 꺾이어 우리나라 경계의 북쪽에 이르러 우뚝하게 일어나서 북진(北鎭)·여진(女眞)·오라(烏喇)의 으뜸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말갈(靺鞨)이 되고 서쪽으로 여연(閭延)·무창(茂昌)이 되고, 서남쪽으로 발해(渤海)가 되었는데, 그 뿌리가 땅에 서리어 수천 리나 뻗어 있다. 그 위에는 큰 못이 되어[天池] 주위가 80리나 된다. `송진택신공 유백두산서(送震澤申公遊白頭山序)`
다산은 가보지도 않은 백두산의 내력이나 역사 지리적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함경도에 개설했던 육진(六鎭)이 모두 백두산 주변에 나열되어 있음도 알게 해주고, 여진·발해·말갈의 영토 위치까지 설명해주고 있으니, 다산의 지리학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도 알게 해줍니다.
우리 일행은 훈춘시(琿春市)를 찾아가 중국·북한·러시아가 만나는 3국의 국경선에서 조국의 분단 현실에 가슴 아파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보은동(甫恩洞)이라는 마을을 찾아 안중근의사께서 하얼빈 거사 전에 살으셨던 초옥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조국독립의 꿈을 키우고, 거사를 모의하고, 동지를 모으며 토론으로 밤을 새우던 안 의사의 고거(故居, 옛집)였습니다. 방안에는 참배객을 위해 의사의 영정도, 제상도 놓여 있었지만, 집이 곧 무너져가는 초가집이었으니,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천장이 곧 내려앉을 지경이고, 집 전체가 기울어 곧 무너질 지경이니 어떡하면 좋을까요. 즐겁고 기쁘던 백두산 여행은 그곳에 와서 슬픔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조치라도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