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 가운데 쌀가루를 끓이다가 유유를 부어 만든 타락죽(駝酪粥)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우유가 귀해 아무나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지요. 명종실록 20년(1565) 8월 14일 치 기록을 보면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올린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 등의 봉서가 나옵니다. 그 내용 가운데는 “타락죽은 임금께 바치는 것인데 사복시(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낙부(酪夫, 우유를 짜는 이)가 젖짜는 기구를 제 집에 가지고 가 조리하게 하여 자녀와 첩까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 사건으로 임금의 외척이며, 영의정이었던 윤원형도 내칠 정도였으니 타락죽은 임금이 내려주는 것 외에 먹을 수가 없던 귀한 음식이었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범의 젖’, ‘유락(乳酪)’ 같은 말이 나는 것은 물론 일본 옛 문헌에 도래인(한국인) 복상(福常)이 효덕왕(孝德王)에게 우유를 바치니 우유가 몸에 좋은 약이라며 화약사주(和藥使主)라는 성을 내리고 자손대대로 조정에서 이 일을 하게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밖에 ≪고려사(高麗史)≫ 권99 “열전(列傳)” 12에 보면 시인 이순우(李純佑)가 관에 올린 기록에 “우유를 약용으로 즐겨 마셔 의관들이 농민의 젖소를 징발하여 우유죽을 만들어 경기지방의 농사를 지을 소마저 상하게 하니 이를 금하게 해 달라.” 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때는 나라의 상설 기관으로 유우소(乳牛所) 또는 목우소(牧牛所)를 두었는데, 조선시대에는 타락색(駝酪色)으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이런 문헌들을 보면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유를 마셨다고 짐작이 되지만 궁중의 보양식 정도로만 여겼지요. 일제강점기인 1933년 8월 6일치 동아일보에 “우유짜기”라는 사진이 실린 것을 보면 당시만 해도 우유는 일반인이 보기도 어려운 귀한 음식임이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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